[이 사람이 읽는 법]무의미함의 가치

  • 동아일보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고레에다 히로카즈 지음·이지수 옮김/448쪽·1만8000원·
바다출판사

“사람들은 원수 갚는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전 세계의 영화가 복수극을 영원한 주제인 양 되풀이해서 그립니다. 가족의 원수를 갚기 위해 주인공이 홀로 여럿에 맞서는 꿈같은 이야기가 수없이 만들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그렇지 않은 영화를 찍고 싶었습니다.”

2007년 4월 20일 저녁 퇴근길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하나’를 봤다. 그가 “용맹하지 않은 무사가 주인공인, 칼싸움 없는 시대극을 만들고 싶어서” 이 영화를 찍었다는 건 3년 전 그의 책을 읽으며 알았다. 고레에다 감독은 ‘하나’ 각본 초고에 “의미 있는 죽음보다 의미 없는 풍성한 삶을 발견한다”는 글을 적어 두었다고 했다.

그가 ‘하나’에 앞서 발표한 ‘아무도 모른다’는 다시 보고 싶어도 선뜻 다시 보기 망설여지는 영화다. “단순히 도취되어 눈물이 나게 만드는 다큐멘터리를 싫어한다”는 감독이 만든 영화인데, DVD 표지만 봐도 울컥하게 된다.

1988년 일본 도쿄에서 애인과 살기 위해 집을 나간 모친을 기다리며 살아가던 4남매 중 두 살배기 막내가 살해당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다. 고레에다 감독은 자식들을 버린 어머니를 악인으로 그리지 않았다. 그는 “영화는 사람을 판가름하기 위해 있는 게 아니다. 영웅도 악당도 없는, 우리가 살아가는 상대적 가치관의 세계를 있는 그대로 그리고 싶었다”고 썼다.

“(아역배우가) 연기를 잘하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장남 역의 야기라 유야는 촬영 후반부에 TV 드라마에 참여하면서 ‘각본에 쓰인 대사를 외워서 연기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아무도 모른다’ 현장에서도 때로 말에 감정을 실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보통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유야 부분은 리허설 없이 곧바로 촬영했습니다.”

설거지를 마치고 TV 앞에 앉으면 살육, 불륜, 정쟁, 복수가 날마다 뒤얽혀 난무한다. 멍하니 보고 있으면 시간이 후딱 간다. 연기가 다들 훌륭하다.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흥미로운 스토리다. 그런데 다 보고 난 기분은 글쎄. 좋은 걸까.

사람을 되도록 가까이하지 않아야 하는 시절에도 당연히 가까이해야 하는 사람과 나누는 짤막한 인사. “왔니. 밥 먹었니.”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는 그와 비슷한 온기를 건넨다. 그의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이들이 나는 몹시 부럽다. 하루에 한 편씩 본다 해도 10여 일의 저녁을 포근한 미소로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1년 전 잠시 만났던 그를 앞으로 다시 만날 기회는 없겠지만, 그의 말투를 꼭 닮은 문장으로 채워진 이 책을 펼치면 곧바로 목소리가 떠오른다. 차분하면서 무겁지 않고, 친절하려 애쓰는 기색 없이 상냥했던.

“영화가 어떤 주장을 소리 높여 내는 게 아니라 영화 그 자체가 풍성한 삶의 실감으로서 존재하는 것. 지금의 제가 지향하는 바입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고레에다 히로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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