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동아일보 기자가 무단이탈해 워싱턴에 간 이유는?

이진 기자 입력 2020-08-04 11:40수정 2020-08-04 14:30
공유하기뉴스듣기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1921년 12월 19일
플래시백

1921년 11월 11일 화성돈(華盛頓)회의가 개막했습니다. 화성돈은 미국 수도 워싱턴의 한자 표기죠. 9개국이 극동과 태평양문제를 협의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군비축소라는 가장 중요한 목적에 집중해서 ‘워싱턴군축회의’라고 부르기도 했죠. 이 회의는 1919년 열린 파리강화회의의 ‘시즌(Season) 2’ 성격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을 마무리하려고 미국이 주도했죠.

파리강화회의 때는 미 대통령 토머스 우드로 윌슨이 스타였습니다. 14개조 평화원칙을 제시했고 국제연맹 창설도 주창했죠.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 등의 반대로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국제연맹은 의회의 반대로 정작 미국이 가입하지 못하고 말았죠. 윌슨의 후임자인 워런 하딩은 워싱턴회의에서 극동과 태평양의 긴장완화를 추진하려고 나섰습니다.

극동과 태평양이라고 했지만 최대의 문제 국가는 일본이었죠. 일본은 유럽 국가들이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르느라 정신이 없는 사이 영일동맹을 내세워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산둥반도에서 독일군을 몰아낸 뒤 1915년 중국에 21개조를 들이밀었죠. 중국을 보호국으로 만들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중국을 독차지하려는 일본에 맞서 미국은 문호개방과 기회균등을 앞세워 경제 진출을 노렸죠. 이 때문에 워싱턴회의는 당시 지구촌 최대의 관심사였습니다.

(왼쪽) 동아일보 1921년 11월 3일자 2면에 실린 김동성의 화성돈회의 출발 기사. 김동성이 무단 출장을 떠난지 5일만에 중역회의가 사후 승인했음을 알려주는 기사였다. (오른쪽) 동아일보 1922년 1월 15일자 3면에 실린 감사 사고. 국내외 동포 형제자매들 덕분에 김동성이 하와이와 워싱턴 출장을 무사히 마치고 귀국했노라고 알렸다.
포와(布哇), 즉 하와이 만국기자대회에 참석한 동아일보 조사부장 김동성의 눈길도 일찌감치 워싱턴으로 향했습니다. 사실 김동성은 만국기자대회에 갈 때부터 역사의 현장인 화성돈회의를 참관하려고 마음먹었죠. 미리 보고했다가는 총독부가 불허할 테니 몰래 가느라고 여비는 고향 개성에 얼마 남지 않은 논밭을 팔아 마련했다고 합니다. 만국기자대회가 끝나가던 10월 29일 김동성은 워싱턴을 향해 출발하죠. 무단으로 출장지를 이탈한 겁니다.

경성을 떠나 일본 요코하마에서 여객선을 타고 하와이에 도착했고 거기서 다시 캐나다 빅토리아 항에 들른 뒤 미국 서부 시애틀 항에 발을 내디뎠죠. 여기서부터는 대륙횡단기차를 타고 워싱턴을 향해 동쪽으로, 동쪽으로 달렸습니다. 하와이에서부터 13일이 걸려 8700㎞가 넘는 거리를 달려간 셈이죠. 도착한 날은 11월 11일, 회의가 개막한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김동성은 출입증도 받지 못한 비공식 취재기자 신세였죠.

주요기사
(왼쪽) 미국 전 대통령 토머스 우드로 윌슨 부부가 화성돈회의 개막일에 열린 무명용사 안장식에 마차를 타고 참석했다. (오른쪽) 김동성(오른쪽)이 화성돈회의를 취재하던 미국 캐나다 영국의 유명 매체 기자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사진을 찍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했던가요. 회의장 앞에서 미국 하원 외교위원장 스티븐 포터와 마주칩니다. 포터는 미 의원단이 조선을 방문하도록 주선할 때 만나 친한 사이였죠. 포터는 즉석에서 출입증을 만들도록 해 김동성은 공식 취재기자로 승격(?)됐습니다. 기자 53명이 몰려온 일본도 회의장 출입기자는 1명에 불과했죠. 일본 기자는 김동성을 보고는 ‘저 요보상(조선놈)은 어떻게 여기에 들어왔는가?’라는 표정을 짓는 듯했답니다.

동아일보사는 김동성의 무단 출장 소식을 듣고 다시 중역회의를 열었습니다. 출장을 사후 승인하고 출장비 2000원을 추가 송금했죠. 김동성 한 명에게 총 4000원, 지금 5000만 원이 넘는 출장비가 나간 겁니다. 동아일보는 이미 화성돈회의와 관련한 엄청난 양의 사설과 기사로 지면을 채우다시피 하고 있었습니다. 11월 11일 이후 그해 말까지 관련 사설만 23건 실었고 ‘화부회의의 연구’ 해설기사를 29회 내보낸 것이 대표적이죠.

(왼쪽) 동아일보가 주최한 환등 강연회의 입장권. 강연 주제는 화성돈회의의 경과이고 연사는 주필 장덕수였다. (오른쪽) 1921년 12월 17일 환등 강연회가 열린 종로 청년회관 안팎의 모습. 어디나 송곳 하나 꽂을 틈이 없을 정도로 인파가 몰렸다.
김동성이 보내온 사진으로 환등을 만들어 강연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슬라이드 쇼를 보여주며 최신 세계정세를 설명한 것이죠. 12월 17일 종로 청년회관에서 열었던 강연회에는 무려 1만 명이 몰려서 전차가 다니지 못하는 상황까지 빚어졌습니다. 3회 상연을 계획했지만 자리를 떠나지 않는 관객 때문에 자칫 사고가 날지도 몰라 2회로 중단하고 말았죠.

관객들은 세계 유명 정치인이나 언론인의 모습에 호기심을 보였지만 김동성이나 샌프란시스코 신한민보 대표 정한경 박사의 얼굴이 나오자 박수를 보냈습니다. 하와이의 조선 동포들이 손님들에게 꽃다발을 전해주거나 하와이에서 태어나 조선이 어디인 줄도 모르는 남녀학생들이 조선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 장면에는 환호성과 함께 눈물을 훔치는 이들까지 있었죠. 역시 피는 물보다 진한 모양입니다. 1921년 12월 19일 3면 기사는 이 광경을 자세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진 기자 leej@donga.com


원문

集會界(집회계)의 前例(전례)를 突破(돌파)한
本社(본사) 主催(주최) 華府會議(화부회의) 幻燈講演會(환등강연회)
운집한 관즁은 장내 장외에 무려 만 명
형세가 너무 위험하야 영사는 두 번만

開會(개회) 前(전)의 一時間(1시간)
회장은 말할 것도 업거니와
정문 젼에도 관즁이 수쳔명


본사 주최의 화성돈회의 강연과 환등회는 십칠일 오후 여섯시부터 종로 청년회관에서 전무한 대성황 속에 열니엇다. 원래 세계만민의 시선을 끄는 큰 사건이니이만콤 일반 인심에 절대한 영향을 이르킴인지 뎡각의 한 시간 전부터 놀난 물결가치 드리 밀니는 군중은 순식간에 대강당 우아래칭에 가득 찻는대 시간이 절박함을 따라 더욱 살도하는 군중은 삼대가치 드러서서 몸을 놀닐 수가 업섯고 뒤를 이어 살도하는 군중은 청년회 온 집안에 빈틈 업시 가득 찻스며 결국은 정문 압까지 꼭 차서 청년회 안에도 드러서지 못한 군중이 수 쳔명에 달하야 종로통 넓은 길도 삑々하게 차서 일시는 뎐차가 불통하게 되엿다.

空前(공전)의 盛况裏(성황리)에
화성돈회의 경과의 강연
관즁의 요구로 환등영사


정각이 되매 리상협(李相協)씨의 사회로 회가 열니어 장덕수(張德秀)씨가 수쳔 관중의 박수 소래에 단에 올나 『화성돈회의 경과』라는 문뎨로 구주 대전란 전 삼국협상과 삼국동맹에 대한 관계로부터 말을 시작하야 구주 대전란 후 렬강의 형세를 대강 말한 후 미국에서 세계의 영구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야 화성돈회의를 주최한 일과 영국 일본 미국이 각々 군비를 주리어 군함을 미국과 영국과는 오십만돈 일본은 삼십만돈의 비례로 주리게 된 말과 일、영、미、불의 사국협정에 대한 말과 중국에 대하야 모든 나라가 차지하얏든 권리를 내놋케 된 말과 영국의 긔반을 벗고자 수백 년 동안 눈물과 피를 흘리든 애란이 영애협뎡(英愛協定)으로 자유국이 된 말로 강연을 계속하는대

이때 살도하는 군중의 형세는 더욱 심하야 물결치듯이 서로 밀니는 사람들은 이로 견듸지 못하고 『사람 살리라』는 부르지짐이 사방에서 이러나고 형세는 더욱 위험하게 되엿스며 군중 속에서는 간々히 회를 중지하라는 말까지 나게 되엿다. 이때 사회자는 부득이 관중에게 『여러분 가운데 상한 사람이 잇슴닛가. 만일 상한 사람이 잇스면 유감이지마는 이 회를 중지하겟다』 물엇더니 군중 속에서는 여출일구로 상한 사람은 업스니 환등을 빗취어 달나고 부르짓는 사람이 만코 살도하든 군중도 저윽이 진정되는 모양이 보힘으로 즉시 공전의 성황 속에 환등을 시작하게 되엿다.

第二次(제2차)는 初次(초차)보다도
더욱 더욱 성황을 이루엇스나
회장이 위험하야 삼차는 즁지


환등은 먼저 『하와이』에서 열니엇든 만국긔자대회로부터 시작되여 먼저 동양에서 그 회에 참가한 유수한 긔자의 얼골이 낫하나고 그 다음은 긔자대회회댱 『윌리암』박사와 본사 대표 김동성(金東成)씨의 얼골이 나란히 낫하나매 수쳔 군중 속에서 우뢰가튼 박수소래가 이러나고 뒤를 이어 만국긔자대회에 조선인으로 참례한 긔자 중 조선내디의 언론계에 동아일보를 대표한 김동성씨와 해외에 잇는 조선인의 언론계를 대표한 상항신한민보(桑港新韓民報) 대표(代表) 정한경(鄭漢景)박사가 나올 때에도 박수가 쏫아지고

그 다음 하와이에 재류하는 조선동포가 처음으로 세계긔자대회에 참가하는 두 대표를 환영하기 위하야 남녀로유가 꼿고리를 던지는 모양과 남의 따에서 고국이 어대인지 알지 못하고 생장하든 하와이의 남녀 청년학생이 신문긔자대회가 열리는 당일에 시위운동을 하는 광경이 낫하나며 설명하는 말이 맛치매 수쳔 군중은 밋친 듯 취한 듯 반가웁고 불상한 마음이 일시에 이러나서 오즉 손바닥이 깨여질 듯이 치는 박수가 한참 동안 긋칠 줄을 모르고 환호성은 청년회가 떠나가는 듯 하얏고 간々히 감격에 사못치는 사람들은 눈에 반가움과 슬품이 한데 얼크러진 눈물을 흘니는 사람조차 잇섯다.

그 후로는 화성돈회의의 성대한 회댱과 온 세상을 진동하는 대정치가의 얼골들과 화성돈시가의 장관과 일홈 모르는 군인의 매골식과 끗흐로는 즁국 쳥년 외교가로 경텬동디의 대활동을 하는 고유균(顧維鈞)씨 부인의 꼿가튼 얼골이 낫하난 후 뎨일회 환등이 맛치엇다. 이때 사회자는 군중에게 향하야 『예뎡과 가치 환등을 삼회에 난호아 할 터이니 먼저 본 관객은 퇴장하기를 간절히 청하매 공덕심을 존중하는 사람들은 뒤를 이어 퇴장하얏스나 다대수는 한 번 더 보기를 원하고 퇴장을 하지 아니하얏다.

사회자는 할 수 업시 뎨이회 환등을 맛치고 다시 군중에게 『여러분은 한 시간 이상을 종로거리에서 떨고 섯는 형뎨를 생각하고 고상한 공덕심을 발휘하야 퇴장하시기를 충심으로 바란다』고 여러 번 말하얏스나 군중 속에는 그대로 안젓는 사람이 여전히 만하서 엇지 할 수 업는 형편이라. 사회자는 이와 가치 치운 일긔에 수천 군중을 한데에서 기다리게 하고 본 사람에게만 세 번을 보히게 함은 참아 못할 일이라 하야 부득이 회를 중지하고 퇴장하게 되엿다.

中止(중지)의 報告(보고)에도
依然(의연)한 群衆(군중)
경관까지 출동하야
만일을 경계케 되야


이와 가치 성황 속에도 청년회 밧게 선 군중은 더욱 증가하야 종로통 일대에는 인산인해를 이루엇고 뎐차가 통치 못하며 심지어 적은 가々에서는 만일을 념려하야 문을 닷은 사람까지 잇섯다. 수천 군중의 형세가 심히 혼잡한 것을 본 종로경찰서에서는 즉시 삼십여 명의 경관을 출동식히어 만일을 경계하고 군중은 두어 시간 동안을 찬바람을 몸에 밧고 기다리다가 할 수 업시 중지되엿다는 말을 듯고 차々 헤여저 가고 청년회 안의 혼잡한 상태는 청년회 설립 이래처음이라. 공덕심을 존중하는 관객은 그 혼잡한 중에도 질서 유지에 노력하얏스나 군중 속에는 간혹 부주의하는 청년이 끼엿든 까닭으로 매우 혼잡을 이루엇섯다.

警官(경관)의 出動(출동)은
만일의 경계일 뿐
본의는 아니라고


당야 광경에 대하야 종로경찰서 모경관은 말하되 『처음부터 강연회가 성황일 것을 예측하고 순사 몃 명을 보내서 경계코자 하얏스나 그러한 집회에 경관을 보내면 일반은 경찰에서 집회를 압박한다는 비평이 업지 아니하겟기로 그만두엇더니 차々 형세를 보건대 군중이 엇더케 만히 모히는지 념려되는 뎜이 업지 아니함으로 만일을 경계하기 위하야 경관을 출동식히기는 하얏스나 본의는 아니라』고 말하더라.


현대문

집회 역사의 전례를 뛰어넘은
본사 주최 워싱턴회의 영상 강연회
모여든 관중은 강연장 안팎에 무려 만 명
몰려든 인파에 너무 위험해 영사는 두 번만


개회 전의 한 시간
강연회장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정면 앞에도 관중이 수천 명


본사가 주최한 워싱턴회의 강연과 환등회는 17일 오후 6시부터 종로 청년회관에서 전에 없던 대성황 속에 열렸다. 원래 세계 만민의 시선을 끄는 큰 사건인 만큼 일반인에게 절대적 영향을 미쳤음인지 시작 한 시간 전부터 놀란 물결같이 들이 밀려오는 군중은 순식간에 대강당 위 아래층에 가득 찼다. 시간이 다가옴에 따라 더욱 쇄도하는 군중은 삼의 줄기같이 들어서서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고 뒤를 이어 쇄도하는 군중은 청년회관 안에 빈틈없이 가득 찼으며 결국은 정문 앞까지 꼭 찼다. 청년회관 안에도 들어서지 못한 군중이 수천 명에 이르러 종로통 넓은 길도 빽빽하게 차서 한때는 전차가 다니지 못하게 되었다.

전에 없던 성황 속에
워싱턴회 경과의 강연
관중의 요구로 환등영사


정각이 되자 동아일보 편집국장 이상협 씨의 사회로 강연회가 열려 주필 장덕수 씨가 수천 관중의 박수를 받으며 단상에 올라 『워싱턴회의의 경과』를 주제로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삼국협상과 삼국동맹에 대한 관계로부터 강연을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열강의 형세를 대강 말한 뒤 미국에서 세계의 영구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워싱턴회의를 주최한 일과 영국 일본 미국이 각각 군비를 줄여 군함을 미국과 영국은 50만 톤, 일본은 30만 톤의 비례로 줄이게 된 내용과 일 영 미 불의 4국협정에 관한 내용과 열강이 중국에 차지했던 권리를 내놓게 된 내용과 영국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수백 년 동안 눈물과 피를 흘리던 아일랜드가 영애협정으로 자유국이 된 내용으로 강연을 계속하였다.

이때 쇄도하는 군중의 모습은 더욱 심해 물결치듯이 서로 밀리는 사람들은 견디지 못하고 『사람 살려』라고 부르짖는 소리가 사방에서 일어났다. 상황은 더욱 위험하게 되었으며 군중 속에서는 간간히 강연회를 중지하라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다. 이때 사회자는 부득이 관중에게 『여러분 가운데 다친 사람이 있습니까? 만약 다친 사람이 있으면 유감이지만 강연회를 중지하겠다』라고 물었다. 군중 속에서는 입을 모아 다친 사람은 없으니까 환등을 비춰 달라고 외치는 사람이 많았고 쇄도하던 군중도 적이 진정되는 모습이 보여 즉시 전에 없던 성황 속에 환등 상영을 시작하게 되었다.

제2차는 1차보다도
더욱 더욱 성황을 이루었으나
강연회장이 위험하여 3차는 중지


환등은 먼저 『하와이』에서 열렸던 만국기자대회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동양에서 대회에 참가한 유수한 기자의 얼굴이 나오고 그 다음은 기자대회 회장 『윌리엄』 박사와 본사 대표 김동성 씨의 얼굴이 나란히 나타났다. 그러자 수천 군중 속에서 우레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나오고 뒤를 이어 만국기자대회에 조선인으로 참석한 기자 중 조선 내지의 언론계에 동아일보를 대표한 김동성 씨와 해외에 있는 조선인의 언론계를 대표한 샌프란시스코 신한민보 대표 정한경 박사가 나올 때에도 박수가 쏟아졌다.

그 다음 하와이에 거주하는 조선동포가 처음으로 세계기자대회에 참가하는 두 대표를 환영하기 위하여 남녀노소가 꽃다발을 던지는 모습과 남의 땅에서 고국이 어디인지 알지 못하고 성장하던 하와이의 남녀 청년학생이 신문기자대회가 열리는 당일에 시위운동을 하는 광경이 나오며 설명하는 말이 끝났다. 그러자 수천 군중은 미친 듯 취한 듯 반갑고 불쌍한 마음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오직 손바닥이 깨어질 듯이 박수를 쳐 한동안 그칠 줄을 모르고 환호성은 청년회관이 떠나갈 듯하였다. 간간히 감격에 사무치는 사람들은 눈에 반가움과 슬픔이 한데 얼크러진 눈물을 흘리는 이들조차 있었다.

그 후로는 워싱턴회의의 성대한 회장과 온 세상을 진동하는 대정치가의 얼굴들과 워싱턴시가의 장관과 이름 모르는 군인의 유해 안장식과 끝으로는 중국 청년 외교가로 경천동지의 대활동을 하는 구웨이준 씨 부인의 꽃 같은 얼굴이 나온 뒤 제1차 환등이 끝났다. 이때 사회자가 군중을 향해 『예정한 대로 환등을 3차에 나눠서 할 예정이니 먼저 본 관객은 퇴장해 달라』고 간절히 요청하였다. 공중도덕을 존중하는 사람들은 뒤를 이어 퇴장하였으나 대다수는 한 번 보려고 퇴장하지 않았다.

사회자는 할 수 없이 제2차 환등을 마치고 다시 관객에게 『여러분은 한 시간 이상을 종로거리에서 떨고 서있는 형제를 생각하고 고상한 도덕심을 발휘하여 퇴장하시기를 충심으로 바란다』라고 여러 번 말하였다. 그러나 군중 속에서는 그대로 앉아 있는 사람이 여전히 많아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회자는 이처럼 추운 날씨에 수천 군중을 한데에서 기다리게 하고 본 사람에게만 세 번을 보여주는 것은 차마 못할 일이라고 판단해 부득이 상영회를 중지하고 퇴장하게 되었다.

중지됐다는 소식에도
의연한 군중
경찰까지 출동해
만일을 경계하게 돼


이와 같은 성황 속에도 청년회 밖에 서 있던 군중은 더욱 늘어나 종로통 일대에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전차가 다니지 못하고 심지어 적은 집집마다에서는 만일을 걱정하여 문을 닫는 사람까지 있었다. 수천 군중의 형세가 심히 혼잡한 것을 본 종로경찰서에서는 즉시 30여 명의 경찰을 출동시켜 만일을 경계했다. 군중은 두어 시간 동안을 찬바람을 맞고 기다리다가 할 수 없이 중지되었다는 말을 듣고 차차 헤어져 가고 청년회관 안의 혼잡한 상태는 청년회 설립 이래 처음이었다. 도덕을 존중하는 관객은 그 혼잡한 속에서도 질서 유지에 노력하였지만 군중 속에는 간혹 부주의한 청년이 끼어들었기 때문에 매우 혼잡을 이루었다.

경찰의 출동은
만일의 경계일 뿐
본의는 아니라고


이날 밤 모습에 대해 종로경찰서 모 경관은 『처음부터 강연회가 성황일 것을 예측하고 순사 몇 명을 보내서 경계하려고 하였지만 그러한 집회에 경찰을 보내면 경찰이 집회를 압박한다는 비판여론이 없지 않을 듯해 그만두었더니 점점 상황을 보니까 군중이 어떻게나 많이 모이는지 염려되는 점이 없지 않아 만일을 경계하기 위해 경찰을 출동시키기는 하였지만 본의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0 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댓글쓰기 Copyright ⓒ 동아일보 & donga.com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기사 의견 0개의 기사의견이 있습니다.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