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을 타고 매 주말에 전국 곳곳에서는 각종 마라톤대회가 열리고 있다. 특히 10km 마라톤에는 젊은 남녀가 대거 몰리면서 다양한 패션이 연출되고 있다. 달리기 편한 ‘기능성’을 감안하고 색다른 감각을 연출하는 젊은이들이 10km 마라톤을 접수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사진은 지난달 19일 열린 2017 서울국제마라톤 겸 제88회 동아마라톤의 마스터스 10km 부문에 참가한 여성들이 출발 전 ‘셀카’를 찍고 있는 모습.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봄바람과 함께 산과 들판이 녹색으로 물들고 꽃이 피면서 주말 도심엔 달리는 사람들의 물결이 넘쳐난다. 겨우내 움츠렸던 몸을 활짝 펴고 전국 곳곳에서 열리는 마라톤대회에 출전하고 있다. 최근엔 ‘인간 승리의 드라마’로 알려진 42.195km 풀코스보다 즐겁게 달리는 10km 마라톤에 젊은 남녀들이 몰리면서 ‘패션쇼’를 방불케 하는 멋진 자태를 뽐내며 달리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달리기에 가장 기본인 신발과 러닝복은 물론이고 모자, 헤드 밴드, 암 밴드, 선글라스, 휴대전화 밴드, 이어폰…. 특히 러닝복의 다양성이 눈에 띈다. 지난달 19일 서울 도심에서 열린 2017 서울국제마라톤 겸 제88회 동아마라톤에서 마련한 마스터스 10km 부문에서는 멋진 몸매에 맞는 마라톤 용품과 장비를 갖추고 달리는 선남선녀들이 가득했다. 한마디로 패션이 서울 도심을 달렸다.
마라톤 패션을 주도하는 집단은 20, 30대의 젊은 남녀다. 특히 젊은 여성들의 마라톤 참가가 늘면서 각종 마라톤대회가 ‘젊어지고’ 있다. ‘꼰대들’만 달리는 것으로 알려진 과거 마라톤과는 차원이 달라지고 있다.
다만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젊은 남녀들이 몸매를 과시하기 위해 ‘과감한’ 패션을 연출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편하고 즐겁게 달리기 위해 ‘기능성’ 패션을 착용하고 있는 것이다. 운동화와 운동복만 있으면 달릴 수 있다는 ‘구식’ 생각이 젊은이들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달리는 데 최적화된 복장. 달리는 젊은이들이 추구하는 모토다. 달림이들이 멋있다고 생각하는 아디다스 ‘얼티메이트 타이츠’, 일명 ‘쫄 팬츠’는 허리 밴드를 얇게 처리해 땀 배출을 원활하게 했다. 일반 밴드보다 21% 가벼운 소재, 28% 빠르게 마르게 한 스포츠 과학의 산물이다. 바람막이 윈드재킷은 물론이고 가슴 부분을 꽉 잡아주는 브라톱, 머리의 땀을 흡수할 수 있는 헤어밴드, 휴대전화로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하는 암밴드 등 편하고 즐겁게 달릴 수 있다면 젊은 세대에게 비용은 큰 문제가 아니다. 지난해 마라톤에 입문한 회사원 이윤미 씨(36)는 “가볍고 편한 복장, 달리기 편한 복장을 하고 달린다. 그래야 달리는 것도 즐겁다”고 말했다. 체력을 키우기 위해 마라톤을 시작한 이 씨는 주중에 2회 달리고 매주말 5∼10km 마라톤에 출전하며 삶의 활력소를 얻고 있다.
국내에서 달리는 젊은 여성들이 급격히 증가한 배경엔 대형 스포츠용품업체의 적극적인 마케팅이 자리하고 있다. 나이키는 2008년 전 세계 수십 개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리는 10km 마라톤대회를 만들었다. 당시 애플사의 아이폰과 나이키 운동화를 연계해 운동량을 데이터화하는 ‘나이키 플러스’를 확산시키기 위한 이벤트였다. 물론 다양한 패션에 관심이 많은 젊은층에게 용품을 팔고자 하는 계산도 있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국내에서만 3만 명이 넘는 사람이 신청해 달렸고 전 세계적으로 수십만 명이 달렸다.
그동안 마라톤은 ‘인간승리’ 드라마의 표상이었고 성취감을 자극했지만 ‘힘들다’는 이유로 젊은층을 파고들지는 못했다. 10km는 달랐다. 어느 정도 운동을 하는 사람이라면 거뜬히 완주할 수 있었다. 마라톤을 ‘꼰대 스포츠’로 치부했던 젊은이들이 뛰어든 배경이다. 한 포털의 마라톤 동호회인 휴먼레이스 카페 회원은 약 1만7000명. 2008년 젊은이들을 주축으로 만든 이 카페엔 요즘 떠오르는 ‘2030’이 50%를 넘는다. 특히 여성들의 참여가 눈부시다. 올 서울국제마라톤 10km 부문에는 역대 최대인 약 1만5000명이 참가했는데 이 중 여성 비율이 36%였다. 특히 20대에선 여성 비율이 절반에 가까웠다. 마라톤을 지도하며 달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초보자들의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는 아디다스 런베이스서울은 지난해 3월 문을 열었는데 1년간 1만5000명이 찾았다. ‘2030’이 대세였다. 손나자용 런베이스 코치(28)는 “평일 약 50명, 주말엔 70∼100명이 마라톤을 하러 온다”고 말했다.
실내에서 피트니스, 필라테스, 요가 등으로 몸매를 가꾸던 젊은 여성도 야외로 나와 달리고 있다. 10km 마라톤은 여성들에게 ‘신세계’를 열어줬다. 겨우내 실내에서 운동하다가 야외에서 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짜릿한 기분을 던져줬다. 달리니 몸매가 달라졌다. 성봉주 국민체육진흥공단 한국스포츠개발원 박사(운동생리학)는 “육상 선수들 몸매를 본 적이 있는가. 육상 선수 출신 모델이 많다. 육상은 인간 몸매를 균형 있게 해준다”고 말했다. 그는 “중력을 거부하며 달리는 마라톤은 몸을 균형적으로 발달하게 해준다. 특정 부위를 발달시키는 운동을 하다가 달리기를 하면 바뀌는 몸을 느낄 것이다. 그래서 달리게 된다”고 덧붙였다.
보디빌딩 미스터코리아 출신 창용찬 대한스포츠아카데미협회 회장은 “요즘 헬스의 트렌드가 조화이다. 근육만 키우는 웨이트트레이닝보다는 달리기 등 유산소 훈련도 강조한다. 그래야 체지방이 더 줄어 더 멋진 몸매를 만들 수 있다. 헬스클럽에 트레드밀(러닝머신) 등 유산소운동 기구가 50% 정도 되는 이유다”라고 말했다. 그는 “실내에서만 운동하던 여성들이 야외에서 달리면서 몸매가 달라지고 색다른 만족감도 얻으면서 10km 마라톤에 몰리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물론 기능성만이 마라톤 대회를 ‘패션쇼’장으로 만들진 않는다. 젊은 여성들의 패션 감각이 10km 마라톤대회를 돋보이게 하고 있다. 전직 스포츠용품회사 관계자는 “젊은 여성들은 운동할 때도 연출을 한다. 똑같은 복장을 계속 착용하지 않는다. 대형 스포츠용품 회사들이 이런 젊은 여성들을 타깃으로 적극적인 마케팅을 벌이는 이유다”라고 말했다. 최근 유행하는 꽉 끼는 레깅스부터 시작해 쇼츠와 브라톱 등을 여러 개 준비해 연출하며 달린다는 설명이다. 이런 여성들을 타깃으로 스포츠용품 업체들은 다양한 마케팅을 벌이고 있다.
아디다스 런베이스는 달리기 초보자들을 마라톤으로 입문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런베이스서울의 경우 남산에서 가까운 이태원동에 자리를 잡고 스트레칭부터 달리기에 필요한 체력까지 키워준다. 참여자들에게 남산과 한강을 여럿이 함께 달리는 기회도 준다. 런베이스서울 강문희 매니저(27)는 “매달 4회에 걸쳐 다양한 주제로 야외에서 달리는 ‘오픈런’이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데 만족도가 높다”고 말했다.
여성을 사로잡는 대회로는 아디다스의 마이런 부산(4월 16일)과 마이런 서울(가을 예정)이 있다. 마이런 부산의 경우 10km 대회이지만 대회 주최 측은 여성을 위해 8km 부문을 만들었다. 10km에 부담을 가진 여성들을 위한 배려다. 여성들을 페이스메이커로 활용해 부담 없이 달리게 하고 있다. 아디다스는 5km, 7km 등을 운영하다가 8km 부문을 새로 만들었다. 나이키는 지난해부터 여성만 달리는 하프마라톤을 만들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러닝 크루’에 가입해 달린다. 과거 마라톤 동호회이지만 마라톤이란 중압감을 주는 표현을 거부하고 달리는 사람들의 모임을 강조하는 동호회다. 헬스클럽을 다니다가 유산소 운동의 필요성을 느껴 2년 전부터 마라톤에 빠져든 권수정 씨(41)는 50∼60명 되는 ‘크루고스트’란 러닝 크루에서 운동한다. 동호인들과 혹은 혼자서 매일 달리고 주말에는 대회에 출전하고 있다. 권 씨는 “달려서, 사람을 만나서 좋다”고 말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그냥 달리지도 않는다. 사회 트렌드로 등장한 ‘기부 달리기’를 하고 있다. 1m 1원을 기부하는 기존 기부와 비슷하지만 개념은 다르다. 광복절을 맞아 8.15km를 달리고 기부하는 ‘815기부’, 세월호를 기억하는 ‘416기부’,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1225기부’ 등 크루별로 다양한 이벤트를 만들어 함께 달리며 기부도 하고 있다.
마라톤계에서도 젊은이들이 10km 마라톤에 참가하는 것을 환영한다. 확장성이 있기 때문이다. 시작은 10km로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하프, 풀코스까지 달리는 게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권수정 씨도 10km로 시작했지만 하프는 물론이고 풀코스만도 3회를 달렸다. 올 서울국제마라톤 풀코스에서 3시간58분대를 기록했다.
전문가들은 대형 용품회사들이 대대적인 마케팅을 통해 젊은 여성들을 달리게 만들었지만 사회적으로 긍정적인 효과를 낳고 있다고 말한다. 학창시절부터 여성들은 신체활동에 적극적이지 못했는데 10km 마라톤 붐을 타고 달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성봉주 박사는 “아주 좋은 현상이다. 여성이 달려야 사회가 밝아진다. 여성이 달리면 장기적으로 남편은 물론이고 아이들까지, 가족이 달릴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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