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마을①] 난세 영웅 바랐던 ‘슬픈 역설의 설화’

  • 스포츠동아
  • 입력 2016년 4월 5일 05시 45분


호서마을회관 앞 정자에서 바라본 수덕산의 풍경. 마을 사람들은 수덕산이 에두른 호동마을 사람들과 대보름이면 줄다리기 대결을 벌이며 정겨운 이웃을 이루기도 했다. 고흥(전남)|김종원 기자 won@donga.com
호서마을회관 앞 정자에서 바라본 수덕산의 풍경. 마을 사람들은 수덕산이 에두른 호동마을 사람들과 대보름이면 줄다리기 대결을 벌이며 정겨운 이웃을 이루기도 했다. 고흥(전남)|김종원 기자 won@donga.com
■ 4. 고흥읍 호동·호서리 수덕산

세밀한 생활사와 풍속사 혹은 세상의 어긋난 도리에 대한 풍자.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동안 윤색과 와전의 과정을 거치기도 하지만 그나마도 이야기를 낳은 공간에서 나고 자란 어르신들의 입이 아니라면 들을 수 없다. 콘텐츠로서 다양한 이야기가 넘쳐나는 시대, 본래의 설화를 들여다보는 까닭이다. 넘쳐나는 대신 그만큼 사라져가는 진정한 스토리텔링 콘텐츠로서 설화의 가치도 뛰어나기 때문이다. 특히 전남 고흥군은 땅과 바다가 어우러지는 반도의 토양 위에서 먼 옛날부터 이야기가 풍성했던 곳이다. 조선시대 류몽인이 이 곳에서 ‘어우야담’을 쓸 수 있었던 한 배경이기도 하다. 웹툰과 애니메이션, 영화와 드라마 등 다양한 대중문화 콘텐츠의 또 다른 원형일 수도 있을 고흥의 설화를, 스포츠동아가 매월 격주 총 20회에 걸쳐 연재한다.

염전·길쌈 허기진 노동속에서도
아이들 교육 포기 안했던 부모들
‘아이 죽인 박씨’의 설화는
난세영웅 기다렸던 역설의 스토리

류몽인 ‘어우야담’ 써내려갔던
감로정 옛 터엔 소나무 홀로이…


전남 고흥군 출신인 박번순 고려대 세종캠퍼스 경제학부 교수가 쓴 책 ‘고흥, 고흥 사람들’에 따르면 고흥이나 흥양(고흥의 옛 이름)을 본관으로 한 성씨는 14개다. 그만큼 고흥군에도 집성촌들이 곳곳에 제법 자리를 잡고 있다.

이제는 그 자취가 사라진 호산을 중심에 두고 그 동·서쪽으로 각각 나뉘어 동서편으로 불린 고흥군 고흥읍 호동마을과 호서마을도 그렇다. 오랜 세월 ‘고흥 류(柳)’씨들이 모여 살아왔다. 그 시조는 고려 문종 때 관리를 지낸 류영이며, 고흥이라는 지명 자체도 고려 충렬왕이 류청신의 공을 인정해 고이부곡을 고흥현으로 승격한 데서 유래한다.

류씨 가문은 오늘날까지 중요한 역사적·문화적 사료를 낳기도 했다. 어우담 류몽인이 지은 ‘어우야담’(於于野譚)이다.

올곧게 뻗어 올린 줄기와 그 삐죽하게 난 솔잎으로 형형한 기운을 내뿜는 한 그루 소나무가 선 감로정 자리. 어우당 류몽인이 사색에 빠져든 곳이다. 고흥(전남)|김종원 기자 won@donga.com
올곧게 뻗어 올린 줄기와 그 삐죽하게 난 솔잎으로 형형한 기운을 내뿜는 한 그루 소나무가 선 감로정 자리. 어우당 류몽인이 사색에 빠져든 곳이다. 고흥(전남)|김종원 기자 won@donga.com

● 세상과 화합하지 못한 풍자의 공간

‘어우야담’은 최초의 설화야담집. 이를 쓴 류몽인은 조선 선조 때 관직에 오른 뒤 광해군을 가르친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당대의 붕당과 정쟁의 와중에 그의 자유분방한 기질은 세상에 녹아들지 못했다. 기질은 대신, 시중에 떠도는 혹은 전래로 이어지던 민간의 다채로운 이야기를 ‘어우야담’에 담아내고 이를 통해 결코 화해할 수 없었던 세상을 풍자하고 해학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 ‘어우야담’이 씌어진 공간, 감로정(甘露亭)이다. 류몽인은 혼탁한 정치의 세태를 멀리 하며 정자를 짓고는 글을 썼다. 호서마을 입구에서 저 멀리 1km 남짓 정면으로 보이는 둔턱에 자리한 감로정에서 류몽인은 아마도 ‘달디 단 이슬’의 차갑지만 청명한 시선으로 저 멀리 득량만의 물결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호서마을 류동준(78) 할아버지는 “한 30m 높이에 둘레가 12m나 될라나. 큰 소나무가 있었는디 시방은 죽어불고 그 손자뻘이나 됐을겨”라며 감로정 자리를 가리킨다. 그 “손자뻘”의 소나무는 그래도 치솟아 저 너른 평야를 지켜보고 있다.

소나무의 줄기 끝과 호서마을을 각기 꼭지점으로 삼는다면 인근 수덕산은 그 나머지 한 점이 되어 삼각형을 이룬다. 해발 300여m의 산은 오랜 세월 봉화대로 나라의 위안을 널리 전파했다. 호서마을 류상진(66) 이장은 “어릴 때 명절엔 산을 오르내리며 놀았제. 소풍도 그리로 갔어요”라면서 “옹달샘도 있었다는디, 거그에 명주실을 던져 넣으면 해창만까지 간다는 전설도 있지요”라며 웃는다.

하지만 이제 사람들은 수덕산에 오르지 않는다. 이 마을 류재덕(75) 할아버지는 “길이 없어놓은께”라며 산 야트막한 중턱에까지 이른 작은 길은 그저 “부락에서 농사질라 혀서 만든 농로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 사람들이 생계를 일군 터전이었던 수덕산의 구전 이야기는 인근 마을들이 품고 있었을 삶에 대한 질긴 의지를 말해주는 듯하다. 어지러운 때에 태어난 특출한 아이 그리고 아이가 그 세상을 향해 나아가면서 맞닥뜨릴 역적 모함의 큰 위험을 미리 막아주려는 부모의 안타까움을 담은 설화는 인근 마을 사람들의 힘겨운 세상살이를 그대로 일러준다.

● 척박한 가난을 벗어나려는 열망

어쩌면 구전의 이야기는 난세의 영웅 혹은 세상을 바꿀 인재를 바라는 역설의 의미가 아닐까. 류동준 할아버지는 “마을 뒷편에 문(問 혹은 文)자 형상의 산이 있지라. 300년 이상 살아옴서 이 곳에선 외부 선생을 들이지 않았어. 마을 사람들이 직접 가르쳤지요”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영웅과 인재를 키워낼 유일한 수단은 교육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오랜 세월 척박했던 이 곳의 환경은 고된 삶 속에서 아이들을 키워내는 데 몰두하도록 했을지 모른다.

호서마을 앞 호산로를 사이에 두고 저 멀리 끝없어 보이는 지평선을 끝으로 내뻗은 평야에는 200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득량만의 물이 드나들었다. 1991년부터 고흥군 두원면 풍류리와 도덕면 용동리 사이의 득량만 바닷길을 막기 시작하며 그 위에 쌓아올린 고흥방조제는 31km²의 너른 평야를 만들어주었다.

“간척이 되기 전에는 반지락(바지락), 낙자(낙지), 꼬막 등을 내다팔았다”는 류재덕씨의 말에 류경진(81) 노인회장은 “그 전서부터 뻘이 기름지고 맛있어. 고흥시내 사람들이 호산서 잡은 낙자고 뭐고, 먼저 묵어부러. 맛이 좋응께”라며 부연했다.

하지만 아이들을 낳아 가르치기에 살림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류 회장은 “아, 요짝(이쪽)에서는 소금을 구웠제. 여자들은 길쌈을 많이 혔어. 남자들은 꾸리(새끼)를 감기도 허고. 그라고 살았어”라고 일러준다. 특히 식민과 땅 없는 소작의 설움은 염전과 길쌈으로까지 이어지는 허기진 노동 속에서도 아이들을 잘 키워내려는 고흥 사람들의 열망을 낳았다.

“배우지 못한 부모들은 교육이 자식의 미래를 바꿔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각 면에서는 기성회가 조직되고 자발적으로 학교를 건립하기 시작했다”고 기록한 ‘고흥, 고흥 사람들’은 “학교에 대해 학부모와 지역사회의 관심은 매우 놓았다. 가난을 벗어나는 지름길이 교육이라는 사실을 부모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호서마을 부모들 역시 마찬가지여서 류재덕 할아버지는 “이 마을에선 대부분 고등학교까지는 다 마쳤지요. 부모들이 제대로 먹도 못허고 그리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말한다. 류 회장도 한 마디 거들었다.

“육군 소장도 나고, 판사도 나고 그랬응께. 우체국장도 있어.”

류 회장은 “긍께 ‘오로’(五老), 다시 말혀서 다섯 원로가 계셨제. 현감이 와서 그들과 지역 사안을 논의혔어. 그리 안하믄 일이 안된께”라며 은근한 마을 자랑을 내놓는다. 임진왜란 때에는 류씨 7충신이 났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그의 자부심은 마을 원로로서 지닌 어떤 것이 아니다. 오래고 고된 노동과 그 세월의 설움 속에서도 아이들을 제대로 길러내려는 부모, 그 자격으로서 마땅한 자부였다. 호서마을 150여명 촌로들이 일군 지난 세월의 흔적이 그의 말에서 진하게 묻어나는 듯했다.

고흥(전남)|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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