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호의 짧은 소설]<44>너의 영혼에 불안이 깃들 때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2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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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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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호 소설가
이기호 소설가
그는 그때 분명 술이 조금 취해 있던 상태가 맞았다. 대학생 제자들과 1차로 중국 음식점에서 고량주를 마시고, 2차로 호프집에 들러 생맥주 네댓 잔을 기울인 이후였다. 그때까지 남아 있던 제자들은 일곱 명. 남학생이 세 명, 여학생이 네 명이었다. 그 자리에서 오고 간 이야기들은 무엇이었는가? 학생들은 모두 영문과에 재학 중이었고, 그들은 그날 그가 담당하고 있는 ‘현대영미문학의 이해’ 시간에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을 읽고 토론한 참이었다. 그래서 술자리에서까지 디킨스의 이야기가 이어졌는가 하면… 그건 아니었다. 이제 해가 바뀌면 졸업반이 되는 학생들은 한동안 ‘테솔 자격증’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호주어학연수에 대한 정보를 교환했으며, 그마저도 잠잠해지자 만국 젊은이들의 공통된 관심사인 ‘연예인’ 걱정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마 그때부터 그는 학생들과의 대화에 끼지 못한 채 조용히 술잔만 기울였을 것이다. 조금 소외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그것을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선생님은 어떤 여자 스타일을 좋아하세요?”

한참 성형 연예인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다가, 한 여학생이 불쑥 그에게 질문을 해 왔다. 모처럼 학생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그는 몸이 자꾸 한쪽으로 쏠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러나 정신은 멀쩡했고, 그래서 무언가 유머러스한 대답을 내놓아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것이 들었다. 그는 이제 겨우 사십 대 초반이었다.

“나? 나는 164cm 이하 여자들은 여자로 치지도 않아.”

그가 조금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말하자, 남학생들이 ‘오우, 교수님’ 하면서 과장된 제스처로 술잔을 부딪쳐 왔다. 자기들끼리 ‘그럼, 여기서 안나, 슬기, 다현이는 여자도 아니네’ 하면서 낄낄거리기도 했다.

“어, 교수님. 그 발언은 좀 위험하신데요. 성희롱적인 요소가 좀 있는데요.”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164㎝가 되지 않는 다현이라는 여학생이었다.

“에이, 그게 무슨 성희롱이야? 그냥 교수님 취향을 말한 건데….”

남학생 한 명이 그 여학생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아니지. 하지 않는다고 하시잖아? 164㎝ 이하 여자들하곤 하지 않는다고. 내 참…. 뭘 하지 않는다는 건지….”

다현이는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서 말했다. 그러자 학생들끼리 서로 웅성대기 시작했다. ‘하지 않는다고 하셨어?’ ‘치지 않는다고 하지 않으셨나?’ ‘나도 하지 않는 거로 들은 거 같은데’…. 정작, 그는 그것을 그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니야, 네가 잘못 들은 거야. 내가 지금 혀가 조금 꼬여서 그래. 그는 그러면서 여학생 앞으로 잔을 내밀었다. 다현이는 그와 잔을 부딪치려 하지 않았지만, 다른 학생들이 우르르 함께 잔을 내밀며 상황을 무마시키려 했다. 그래, 그래, 네가 잘못 들은 거야. 다른 학생들은 그렇게 다현이의 손에 억지로 술잔을 쥐여 주었다. 짠. 그는 그것으로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했다.

당시엔 분명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집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잡아탄 순간부터… 그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별다른 문제는 없겠지만, 또 반대로 돌이킬 수 없는, 곤란한 처지에 내몰릴 수도 있는 문제였다. 그의 머릿속엔 학교 내에 있는 양성평등 상담센터가 떠올랐다. 지난 학기 추문에 휩싸였던 미대 교수의 일도 떠올랐다. 분명 다현이가 잘못 들은 게 맞지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확신할 수 없으면 변호할 수도 없는 법. 그는 고심하다가 택시 안에서 다현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현이니? 선생님인데….”

전화는 연결되었지만, 여학생은 말이 없었다. 그래도 그는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저기… 선생님이 정말 걱정돼서 그러는데… 아까 그 말 있잖니…. 그거 진짜 네가 잘못 들은 거거든….”

택시기사는 그가 통화를 시작하자마자 라디오 볼륨을 최대한 작게 줄여 주었다.

“하지 않는 게 아니고, 정말 치지 않는다고 했거든. 선생님이 어떻게 너희들 앞에서 그런 말을 해? 그리고… 치지 않는다는 것도 다 농담이거든…. 선생님 아내도 158㎝야…. 그러니까… 그건 정말 웃기려고….”

그는 허리를 조금 굽힌 상태에서 계속 통화를 했다. 처음엔 그러지 않았는데, 말을 하면 할수록 무언가 울컥하는 것이 치밀어 올라왔다.

“저기 다현아…. 사실 선생님이 강의 전담 교수잖아…. 다음 학기에 재계약도 해야 하는데… 이런 게 문제가 되면… 저기 다현아…. 정말 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고… 치지 않는다고 한 거야…. 그것도 기분 나쁘면… 내가 사과할게…. 그러니, 다현아…. 응?”

다현이는 계속 말이 없었다.

이기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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