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뚱한 실험]종이책 펴니… 앞에서 ‘큭큭’, 전자책 여니… 옆에서 ‘힐끔’, 스마트폰 켜니… 아무도 몰라

김윤종기자 입력 2015-10-13 03:00수정 2015-10-13 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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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소설 공공장소서 ‘안전’하게 읽기
10월 5일 오후 8시 반 서울의 지하철.

“옆에 서 있는 20대 여성이 자꾸 쳐다보는 것 같다. 민망하다. 자격지심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글자가 눈에 안 들어왔다.”

공공장소에서 ‘그레이’(시공사)를 읽을 때의 느낌이다. 최근 출간된 이 책은 세계적으로 1억2000만 부가 팔리며 현대인의 성적 판타지를 자극했다는 평가를 듣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의 후속작이다.

기자는 10월 5∼8일 동아일보 사옥이 있는 서울 광화문 인근 지하철 2호선 시청역에서 합정역까지 첫 이틀은 종이책 ‘그레이’를, 나중 이틀은 전자책(e북·사진) ‘그레이’를 지하철 내에서 읽어봤다. 전자책 분야 ‘킬러콘텐츠’라는 ‘19로설’(19금 성인용 로맨스 소설의 줄임말)을 읽는 독자들의 심리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첫날. 시청역에서 지하철을 타자마자 출입구 옆에 기대 종이책의 표지가 사람들에게 다 보이게 한 후 읽기 시작했다. 태연한 척했지만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여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대역에서 여성들이 우르르 타자 책 표지가 땅으로 향했다. 표지가 남에게 잘 보이지 않게 책을 든 손목의 각도를 본능적으로 꺾은 것.

이틀째, 출근길 지하철에서는 앞에 앉은 남녀가 종이책 ‘그레이’를 든 기자를 보며 ‘큭큭’대며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렇지 않은 듯 두 정거장을 버텼지만 결국 옆 칸으로 슬쩍 옮겼다. 시청역에서 내리자 셔츠 등 부분이 5분의 3가량 땀으로 젖어 있었다.

사흘째인 7일에는 전자책 단말기에 ‘그레이’를 넣고 지하철로 향했다. 마음이 편했다. ‘어떤 책을 읽는지 남들이 모르게 하는 것’ 자체가 전자책의 큰 장점 중 하나임을 절실하게 느꼈다. 집중해 책을 읽다 옆을 보니 30대 남성이 힐끔힐끔 화면을 훔쳐보는 것 같다. 방심은 금물. 마지막 날에는 ‘그레이’ 전자책을 스마트폰에 넣었다. 홍대입구역에서 많은 인파가 들어왔지만 옆에 누가 있든 거리낌 없이 읽기에 몰입했다.

4일간의 간단한 실험을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책의 형태에 따라 심리적인 상태는 크게 달라졌다. 실제 ‘그레이’ 시리즈의 국내 판매량 71만 권 중 28만 권은 전자책으로 팔렸다. 보통 전자책 판매비율이 종이책 판매의 10%가 채 되지 않는 것을 감안할 때 이례적이다.

전자책, 웹소설 시장은 크게 성장 중인 가운데 ‘19금 로설’이 대세로 자리 잡았다. 공공장소에서 야한 소설을 읽는다고 비난받을 이유는 없다. 시험과 취업, 실직 등 녹록하지 않은 현실 속에서 누릴 수 있는 사소한 즐거움 아닐까.

김윤종 기자 zoz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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