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문에 달린 커튼, 함부로 젖히지 마시오!

  • 동아일보

스페인 작가 페자크의 독특한 벽화

페자크가 서울 YMCA 별관 골목 철문에 커튼을 그리는 모습. 페자크 제공
페자크가 서울 YMCA 별관 골목 철문에 커튼을 그리는 모습. 페자크 제공
구름 없이 갠 날 해질녘 서울 종로구 낙산공원 카페에 가보자. 운 좋게 시간이 맞았다면 창문 너머로 헬리콥터에 대롱대롱 매달려 가는 저녁 해를 목격할 수 있다. YMCA 별관 근처에 있다면 골목길 푸른색 낡은 철문을 찾아보자. ‘어라, 철문에 커튼을 달아놨네.’ 손을 뻗어 젖히고 싶다면 조심하길. 손에 닿는 건 면직 커튼이 아니라 철판 위 커튼 그림이다.

갑자기 돋아난 듯한 이 두 그림은 지난주 처음 서울을 찾은 스페인 화가 페자크(Pejac)가 남기고 간 작품이다. 주말 한 중식당에서 만난 그는 본명과 나이를 밝히길 거절하고 “예명으로 쓰는 ‘페자크’는 스페인인 아버지와 결혼한 프랑스인 어머니의 옛 성”이라고만 답했다. 얼굴 전체가 정면으로 나오는 사진 촬영도 당연히 불가능했다.

작품 외의 개인 정보에 대한 관심을 부담스러워하지만 이 건장한 꺽다리 미남 화가의 작업 방식은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허락 없이 작업 흔적을 남기는 그라피티 작가들과 다르다. 벽화는 그의 작업에서 절반 정도 비중을 차지한다. 그의 인터넷 홈페이지(pejac.es)는 이메일 외에는 일말의 개인정보 노출 없이 오직 작업실 안에서 그린 캔버스 회화와 벽화만 나눠 소개하고 있다.

‘혹시 영국의 정체불명 벽화 작가 뱅크시처럼 벽화를 통해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은 건가’ 질문했다.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걸 정해 놓고 작업하지 않는다. 그저 다양한 환경을 접하고 그때그때 적절한 아이디어를 떠올려 그려내는 일이 즐겁다. 공개적 장소에서의 작업이라도 구경하는 이들이 뒤에 둘러서면 어색하고 부담스럽다. 내 작업은 ‘타이밍 싸움’이다.”

짤막한 첫 한국 방문 기간 그는 부지런히 움직이며 두 점의 벽화를 더 남겼다. 건대입구 지하철역 인근 야외공연장 벽 위에는 미사일에라도 맞은 듯 연기를 내뿜으며 추락하는 종이비행기가 떴다. YMCA 별관 2층 창문에서는 전봇대 위에 올라가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소년을 만날 수 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페자크#커튼#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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