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영의 따뜻한 동행]목숨 값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4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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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우리 가족이 차를 타고 나들이 갈 때였다. 아빠가 급브레이크를 밟아 차가 출렁하자 깜짝 놀란 아들에게서 튀어나온 말, “아빠 때문에 위인전에도 못 나오고 죽을 뻔했잖아요.”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이 위인전에 푹 빠져 있던 무렵의 일이다. 그런데 몇 달 후에 비슷한 상황이 또 벌어지자 이번엔 아빠가 얼른 선수를 쳤다.

“아이쿠, 우리 아들이 위인전에도 못 나오고 죽을 뻔했네.”

그러나 위인전에 나오겠다는 결심이 대단했던 아들이 이번에는 시큰둥하게 “아빠, 나 위인전에 안 나갈 거야”라고 말했다. 위인전을 읽어보니 죄다 죽은 사람들뿐이라면서 자기는 죽지 않을 거라서 위인전에 나올 수 없다는 것이다.

평소에 엉뚱한 말을 잘해서 우리를 웃게 만들곤 하던 아들이 그날따라 진지한 얼굴로 오백 살까지 살 것을 거듭 다짐했다. 겨우 여덟 살 아이가 죽음에 대해 뭔가 생각을 갖게 된 모양이었다.

요즘 온 나라를 뒤숭숭하게 만드는 뉴스를 지켜보다가 갑자기 20년 전의 일이 떠오른 것은 국무총리가 “목숨을 내놓겠다”고 한 발언 때문이었다. 돈을 받았다면 목숨까지 걸겠다는 강한 수사적 표현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 왜들 이렇게 목숨을 헐값 취급하는 걸까. 이미 돈을 줬다는 사람도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여 충격을 준 마당인데 말이다.

언제부턴가 문제가 생기면 정면으로 돌파하지 않고 삶을 포기해버리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나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 1위라는 통계가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데 한 나라의 총리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데에 목숨까지 건다는 말은 아무래도 지나치다.

엊그제 월요일 오후에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에서 4·19혁명과 5·18민주화운동, 그리고 6월 민주항쟁을 기록한 사진 전시회와 좌담회가 열렸다. 그야말로 목숨 걸고 촬영한 사진들과 긴박한 상황에서도 순간을 놓치지 않은 사진가들이 역사의 현장을 증언했다. 총알이 날아오는 속에서도 기록을 멈추지 않은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감동이 밀려왔다.

목숨을 바쳐 자신의 책무를 다하고자 하는 사람들. 아마 목숨은 그런 일에 내놓는 것일 터, 하나뿐인 귀하고 소중한 생명을 함부로 내놓는 것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모독이다. 만물이 생동하는 계절에 생명의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윤세영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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