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관우의 묘가 왜 국가지정 문화재가 되었을까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28일 03시 00분


코멘트

장경희 교수 ‘동관왕묘’ 논문 눈길

서울 종로구 숭인동의 보물 제142호 동관왕묘에 있는 금동제 관우신상. 높이 약 2.5m인 관우상은 조선과 명나라 장인이 왕실의 명을 받아 당대의 기술력을 총동원해 만든 작품이다. 장경희 교수 제공
서울 종로구 숭인동의 보물 제142호 동관왕묘에 있는 금동제 관우신상. 높이 약 2.5m인 관우상은 조선과 명나라 장인이 왕실의 명을 받아 당대의 기술력을 총동원해 만든 작품이다. 장경희 교수 제공
지난주 포털 사이트 검색어 순위에는 ‘동묘’가 상위권에 올라왔다. MBC ‘무한도전’에서 정형돈과 지드래곤이 이곳 구제시장을 찾아 누리꾼들이 새삼 관심을 갖게 된 것. 동묘는 서울 종로구에 있는 ‘동관왕묘(東關王廟)’의 줄임말이다. 중국 촉나라 장수 관우(關羽·?∼219)를 모신 묘로 보물 제142호인 국가지정문화재다.

동관왕묘는 17세기 유례가 드문 ‘한중 합작 예술의 전형’으로 조선과 명나라 왕(황)실의 국토수호 의지를 담은 정부 간 공공협력의 결과물이다. 장경희 한서대 문화재보존학과 교수는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술저널 ‘문화재’ 제46권에 게재한 논문 ‘동관왕묘의 조각상 연구’에서 동관왕묘의 유래와 가치를 자세히 소개했다.

중국인들이 관우를 신격화해 전국에 수많은 관왕묘를 세운 건 널리 알려진 사실. 왕보다 격상시킨 관제(帝)묘가 약 30만 개 산재해 있다. 국내에는 1598년 정유재란 때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 장수들이 왜적 퇴치를 기원하며 건립하기 시작했다. 현재 경북 안동 전북 남원 등 10여 곳에 남아있다.

명군이 자체적으로 세운 관왕묘와 달리 동관왕묘는 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컨소시엄을 구성해 추진한 국책사업이었다. 선조 32년(1599년) 조선 왕실이 ‘동관왕묘조성청’이라는 임시기구를 만들어 명 황제가 파견한 기술자를 포함해 총인원 2400명을 투입해 관왕묘를 건립했다. 묘는 1601년에, 내부 조각상들은 1602년에 완성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장 교수는 “처음에는 한양 서남북에도 관왕묘를 세웠으나 1908년 일제의 강압으로 순종황제가 이를 동관왕묘로 합쳤다”고 설명했다. 자신들을 물리치려는 의도가 담긴 문화유산을 축소·격하시키려던 일제의 의도였다.

일제의 치졸한 방해에도 동관왕묘의 역사적 가치는 퇴색하지 않았다. 당대 한중 장인들이 힘을 모아 빚어낸 예술성이 잘 구현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대표 조각상인 ‘금동제 관우신상’은 구리 4000여 근(약 2.4t)을 들여 만든 높이 2.5m의 거작이다.

금동제 관우신상은 초기에 명나라 단독으로 구리 3800근으로 만들려다 실패했다. 하지만 조선 동장(銅匠)이 기술력을 보탠 뒤 300근 정도를 더 투입해 주조에 성공했다. 조선에서 제작된 유일한 관우 금동상으로, 명대에 유행한 당송시대 의복 양식을 살필 수 있는 작품이다. 관우상 앞에 배치한 소조상인 관평(關平)과 주창(周倉) 왕보(王甫) 조루(趙累)는 실존했던 인물들로 역시 예술성이 높다.

동관왕묘는 원래 중국 문화이지만 관우상 뒤 일월오봉도나 앞쪽 한 쌍씩의 문무관 배치는 ‘조선식’이다.
동관왕묘는 원래 중국 문화이지만 관우상 뒤 일월오봉도나 앞쪽 한 쌍씩의 문무관 배치는 ‘조선식’이다.
동묘는 중국에 바탕을 둔 유물임에도 한반도의 고유한 색채를 살려 더욱 매력적이다. 관우를 호위하는 문인(관평·왕보)과 무인(주창·조루) 한 쌍씩을 세운 것도 동관왕묘만의 독특함이다. 중국 관제묘는 보통 문인 한 쌍만 놓는데, 문무 한 쌍씩을 배열하는 방식은 조선 왕릉의 석조상 배치와 같다.

관우 뒤편에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해와 달, 다섯 봉우리가 그려진 그림)가 있는 것도 조선 스타일이다. 2011년 ‘동관왕묘 소장유물 기초학술조사’에서 일월오봉도 뒤편에 숨겨져 있었던 것으로 밝혀진 대형 운룡도(雲龍圖) 역시 조선 중기 왕실 미술의 특색이 잘 드러난다.

동관왕묘 유물들은 중국의 대표적 관우 신전인 ‘제저우(解州) 관제묘’나 관우의 목이 묻혔다는 뤄양(洛陽)의 관림(關林)보다 시기가 앞선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크다. 1593년 조영한 제저우 관제묘는 청대에 중건됐다. 관림 역시 18∼19세기에 다시 만들어졌다. 장 교수는 “동관왕묘는 본산인 중국과 비교해도 시기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한 차원 높은 문화재”라고 말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삼국지#관우#문화재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