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일흔일곱, 그 세월을 돌이켜 보니 언제쯤 끝날지 알 수 없던 무명시절과 과분한 사랑을 받았던 시간들이 떠오릅니다. 모두 일장춘몽 같습니다.”
올해 우리 나이로 77세, 희수를 맞은 김종학 화백(사진)의 소회다.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는 작가의 희수 기념으로 ‘진정(眞情)’전을 연다. 12일부터 7월 7일까지. 02-2287-3500
본관과 신관, 두가헌 갤러리까지 통틀어 한 작가의 개인전을 여는 것은 처음이다. ‘국내 정상의 블루칩 작가’라는 고정관념이 그의 진면목을 가린 것은 아닌지 되짚는 의미로 회고전 아닌 대규모 개인전을 꾸렸다.
전시에선 그가 직접 고른 핵심적 작업과 더불어 초기 판화들, 골동수집가로 이름 높은 그의 목기 컬렉션이 비등하게 무게중심을 이룬다. 잘 알려진 회화에 비해 덜 알려진 화가의 내밀한 면모와 접할 기회다.
○ 농기구에서 예술성을 발견하다
김종학 씨가 남다른 눈썰미로 수집한 옛 농기구들. 조각 작품 못지않은 조형미를 보여준다.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전시의 첫머리는 쓰임새와 꾸밈새가 서로 다투지 않는 전통 농기구가 차지한다. 다듬지 않은 듯 수수한 옛 농기구는 작가에게 영감의 원천이며 그 소탈하고 자연스러운 매력은 그가 추구하는 예술의 경지와 통한다.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않아 폐기 처리될 운명에 처한 낡은 농기구에서 눈 밝은 화가는 서구 거장의 미니멀한 조각 못지않은 예술성을 찾아냈다.
우리 것에 대한 남다른 안목과 애정으로 수집한 농기구 중 일부를 화가가 직접 전시장에 배치했다. 양반댁에서 쓰던 고급 가구도 아니고 시골 농부들이 논밭 갈 때 썼던 허름한 연장들이 놀라운 조형언어와 비례감을 보여준다. 전통에서 미를 재발견하고 의미를 부여한 화가의 수집행위는 취미를 넘어 그 자체로 예술행위로 평가받을 만했다.
1970∼90년대 목판화와 인물화도 깊은 맛이 있다. 남녀를 그린 목판화와 원판은 단색조 작업으로 투박해서 정이 간다. 인물화는 색채 중심의 표현방식으로 신선한 느낌을 준다.
○ 다시 도전을 계속하다
올해 희수를 맞은 화가 김종학 씨의 신작 ‘월하’는 181.7×291cm 크기의 대작이다. 하늘에 뜬 달까지 집어삼킬 듯한 덩굴식물의 생명력과 생동감이 돋보인다. 갤러리 현대 제공이혼이란 인생의 쓴맛을 겪은 뒤 설악산에 틀어박혀 풍경을 즐겨 그리면서 ‘설악의 화가’로 알려진 김 화백. 그는 서양화 재료를 사용해 동양화의 기운생동을 표현하는 추상적 사실화가로 평가된다.
그가 대표적 인기작가로서 ‘타락해서 꽃만 그린다’ ‘치마부대에 영합한다’는 비판에도 꿋꿋한 이유는 자연의 꿈틀대는 생명력을 표현하는 것이 평생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화가는 40대의 자신을 모방하는 것, 더이상 도전하지 않는 것이 두려울 뿐이라고 말한다.
“50대가 되어서야 내 작업이 보였다. 할아버지는 ‘화가는 60이 넘어야 하고 시인은 70을 넘어야 한다’고 하셨는데 맞는 말 같다. 죽는 날까지 작업한 화가들처럼 여기서 주저앉지 않고 대작 중심으로 작업하고 싶다.”
전시엔 울창한 넝쿨이 달과 어우러진 폭 3m의 ‘월하’가 신작으로 선보였다. “혼자 있기 좋아하고 열중하는 재주가 있다”며 스스로 ‘도깨비’라 표현한 그의 다음 작업이 기대된다. “도전은 매일 새로운 걸 추구하던 도중에 갑자기 희한한 길을 찾는 게 아니다. 내 몸 속에 들어왔던 인연들을 꺼내서 재구성하고 표현하는 것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