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킷리스트의 꿈을 이룬 사람들]“명마 정액 한방울은 다이아몬드 1캐럿”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3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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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는 설명 안되는, 말이 주는 오르가슴… 일착!

잡생각이 들 때, 새벽에 잠이 안 올 때 마주 지대섭 씨는 마방을 찾는다. 그는 “나이 앞에 7자가 붙은 노년에도 내 삶이 활기를 잃지 않는 건 말이 곁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 씨가 경기 과천시 서울경마공원 안에 있는 마방을 찾아 말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 과천=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잡생각이 들 때, 새벽에 잠이 안 올 때 마주 지대섭 씨는 마방을 찾는다. 그는 “나이 앞에 7자가 붙은 노년에도 내 삶이 활기를 잃지 않는 건 말이 곁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지 씨가 경기 과천시 서울경마공원 안에 있는 마방을 찾아 말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 과천=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어쩌다 마주(馬主)가 됐을까?

돈이 많아서? 마주가 되려면 돈이 좀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돈 많은 사람들이 다 마주가 되려는 건 아닌데…. 그럼 그냥 말이 좋아서? 그랬다면 굳이 비싼 경주마일 필요가 있을까? 경주마는 승용마보다 값이 훨씬 더 나간다.

‘개 조심! 주인白(백).’

대문 앞에 이런 글을 써 붙인 개 주인은 아무 개나 키워도 되지만 마주는 다르다. 꼭 경주마의 주인이라야 한다. 아무 말이나 안 된다. 마주협회는 경주마 주인만 회원으로 받아들인다. 유원지나 놀이시설 주변에서 볼 수 있는 관광용 마차 주인이 “나도 마주다”고 하면? 글쎄, 뭐 할 말은 없다. 어쨌든 지금부터 얘기하는 마주는 경주마를 가진 사람의 얘기다.

15일 경기 과천시 서울경마공원 안에 있는 서울마주협회 사무국.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주 지대섭 씨(70)다. 미국 서부 개척시대에 카우보이들이 즐겨 맸다는 끈 모양의 볼로타이를 목에 둘렀다. 타이 가운데에는 편자 모양의 메달이 달렸다. 메달 한복판에는 경주마 한 마리가 폼 나게 자리를 잡았다. 사람을 제대로 잘 찾아왔다는 사인처럼 메달이 한눈에 쏙 들어왔다.

“뭐가 궁금해서 왔소?”

“‘버킷리스트의 꿈을 이룬 사람들’이라고….”

대답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말을 잘랐다. “나는 아직 꿈을 못 이뤘는데….” 제대로 찾아온 게 아닌가? 헛다리를 짚었나?

“그래도 마주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 처지에서 보면 꿈을 이룬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하면 뭐…. 그럼 마주가 된 스토리를 얘기하면 되겠구먼.” 딴 데로 샐 뻔한 얘기를 일단 붙들어 놨다.

“16년 전이지. 마주가 된 게.” 처음 말을 갖게 된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9월인가 10월인가 여기(경마공원) 왔다가 단번에 이거다 싶었지.” 요즘 얘기로 한눈에 ‘필이 꽂혀’ 마주가 됐다는 얘기 같았다.

그는 1997년 당시 국회의원으로 문화체육공보위원회 소속이었다. 경마공원에는 한국마사회 국정감사 때 왔었다. 일할 만큼 한 뒤 노년에는 무엇으로 시간을 보내나 하는 고민을 하던 때였다고 한다.

125만 m²(약 37만8000평)에 이르는 탁 트인 경마장, 마방(馬房)에서 본 미끈한 말 뒷다리, 경주마의 스피드. 이런 것들이 고민을 한방에 해결해줬다. 국정감사가 끝나기 바쁘게 그해 11월 21일 그는 마주로 등록했다.

마주가 되고 나면 누구나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 것. 일착(一着), 바로 우승의 순간이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첫 일착의 순간은 마주들이 죽을 때까지 ‘슬로비디오’로 머릿속에 남는다고 한다.

“그때 완전 뒤집어졌지. 지금도 일착을 한 번 하면 그 기분이 한 달을 계속 가. 그냥 계속 웃고 다니는 거야. 그러니 첫 일착 때 기분은 어땠겠어. 말로는 설명이 안 되지. 오르가슴 같은 거야.”

마주가 되고 1년 만인 1998년 11월 7일에 첫 일착의 기쁨을 맛봤다. 1000m 경주에 나선 세 살짜리 암말 ‘무등산’이 가장 먼저 결승선을 지났다. 일착 상금은 374만 원이었다. 경주에 따라 상금은 천차만별이다. 국내에서는 총상금 7억 원이 걸린 대통령배 경주의 우승 상금(3억7800만 원)이 제일 세다.

그동안 얼마나 벌었을까. ‘억소리’ 난다. 순위 상금으로 36억2927만6000원을 벌었다. 지금까지 그가 보유했던 경주마 63마리가 벌어들인 총상금이다. 지금은 9마리를 갖고 있다. 규정상 최대 10마리까지만 소유할 수 있다. 그의 말들은 976차례의 경주에 나가 일착 101회, 이착 95회, 삼착 85회를 기록했다. 나쁘지 않은 성적이다.

마주가 되기만 하면 이 정도는 누구나 벌 수 있을까. 이런 기대를 갖고 마주가 됐다가는 ‘곡소리’ 나는 수가 있다. “1년에 10억 원 넘게 버는 마주도 있지만 전체 마주의 40% 정도는 1년 내내 일착 한 번 못 해봐. 평생 못 해보고 끝나는 수도 있지. 흑자를 내는 경우도 있지만 손해 보는 사람이 더 많아. 사료 값도 안 나오는 말도 많으니까. 긴 안목을 갖고 사업체 하나 운영한다고 생각해야 해. 단숨에 돈 벌 걸로 생각하면 오산이야.”

사료 값도 안 나오는 말이라…. 마주에게는 난감할 수 있다. 이런 말을 이 바닥에선 일명 ‘변마’라고 부른다. 똥말이란 얘기다. 경주마 한 필에 사료 값과 관리비를 합쳐 매달 130만 원가량이 들어간다. 1년이면 1500만 원이 넘는다. 말이 어디 좀 아프거나 다치기라도 하면 치료비까지 얹어야 한다. 말을 좋아하지 않으면 생돈 들여가면서 똥말을 몇 년씩 데리고 있기는 힘들다.

“아까 내가 사업체 하나 운영한다고 생각하라고 했지? 적자가 나도 자기 사업에 애착을 갖고 키우겠다는 생각이 있어야 계속 굴릴 수 있잖아. 말도 마찬가지야. 말한테 애정이 없으면 마주 오래하기 힘들어.”

그는 자다가 새벽에 깨면 서울 성북동 집에서 과천 마방으로 간다. 잡생각이 들 때도 마방을 찾는다. 말을 쓰다듬고 먹이도 준다. 그러다 보면 마음이 그렇게 편안해질 수가 없단다. “마주가 안 됐으면 노후가 어땠을까 싶어. 삭막했겠지…. 말은 이제 가족이나 마찬가지야. 내 말이 경주에 나가는 날은 꼭 내 아들이 올림픽에라도 출전하는 기분이야. 출발 직전에는 가슴이 펄떡펄떡 뛰고 그래.”

말 사랑이 깊어졌다. 경주마 생산에 나섰다. ‘생산자 마주’가 된 것. 2008년 제주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에 녹원목장을 열었다. “경제, 스포츠, 예술 분야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에 근접했는데 경마는 아직도 삼류야. 경마 시설이 아무리 좋으면 뭘 하나, 국산 말이 국제대회에 나가 거둔 성적이 없는데…. 마주로서 부끄러운 일이야.” 국제경주분류위원회(ICSC)는 등급을 파트1부터 파트3까지 나눠 놓았다. 일본은 파트1이다.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는 파트2다. 한국은 그 아래인 파트3이다.

생산자는 경주마로 뛸 때 성적이 걸출했던 말들을 씨수말, 씨암말로 사들인 뒤 다른 말과의 교배를 통해 경쟁력 있는 자마(子馬·새끼 말)를 생산한다. “경주마는 혈통이 아주 중요해. 경마를 ‘혈통의 스포츠’라고 하잖아. 그 왜 ‘혈통 좋은 명마의 정액 한 방울이 다이아몬드 1캐럿과 맞먹는다’는 얘기도 있잖아.” 캐나다의 부호 에드워드 테일러가 갖고 있던 전설적인 명마 노던댄서(1961∼1990)가 은퇴 후 씨수말이 된 뒤 1회 교배료가 한때 100만 달러(약 11억 원)를 넘어가면서 나온 얘기다. 엄청난 액수의 교배료에도 씨를 받으려는 암말들이 줄을 서 노던댄서는 635마리의 자마를 생산했다.

‘당대불패’ ‘절대강자’ ‘황금질주’ ‘필승여왕’ ‘퍼펙트특급’ ‘천년의비상’…. 경주마는 대개 빠르고 강하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네다섯 음절의 이름을 가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는 이름을 좀 다르게 짓는다. ‘프로인그란’ ‘브라이언호크’ ‘화이트핫디시’…. 이름만 봐서는 잘 뛴다는 느낌도, 강하다는 인상도 풍기지 않는다. 모두 혈통이 반영된 이름이다. ‘화이트핫디시’는 엄마 말이 ‘쉬저핫디시’이고, ‘프로인그란’은 아버지 말이 ‘인그란디어’다. ‘브라이언호크’는 수말 ‘호크윙’의 딸이다.

“경주마는 혈통이 능력의 반 이상을 결정한다고 봐도 돼. 가능하면 조상 말과 관련이 있는 이름을 지으려고 하는 편이야.” 평생 잊지 못할 첫 일착의 기쁨을 안겼다던 15년 전 그 말 이름은 왜 ‘무등산’일까? “내 고향이 광주라서….” 지금만큼 말 혈통에 대한 관심이 깊지 않았을 때 지은 이름이다. 경주마 이름은 띄어쓰기 없이 8음절을 넘지 않는 범위에서 마주가 직접 짓는다. 1음절로는 지을 수 없다.

경주마를 9마리나 갖고 있는데 가끔은 직접 타보지 않을까?

“운전면허증 갖고 있지? 그렇다고 포뮬러원(F1) 같은 데서 볼 수 있는 경주용 자동차 몰 수 있나? 경주마는 승용마하고 달라. 전문 기수가 아니면 몰기 힘들어.” 빠른 편에 속하는 경주마의 시속은 60km 정도다. 육상으로 치면 100m나 200m를 뛰는 스프린터에 해당하는 단거리(400m)용 경주마 ‘쿼터호스’ 종(種)은 시속이 90km나 된다. 말 주인이라고 무턱대고 탔다가는 낭패 보기 십상이다.

인터뷰 첫머리에 그는 “아직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었다. “내 말이 두바이 월드컵 같은 세계적인 경주에서 우승하는 것, 세계무대에서 통할 수 있는 빠르고 강한 말을 생산하는 것, 그런 게 내 꿈이야. 죽기 전에 못 이룰 수도 있겠지만….”

자리를 정리하는데 “꼭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고 했다. “지난해 기준으로 매출(7조9000억 원)의 20%에 가까운 1조4650억 원을 세금으로 낸 게 경마다. 여기에 가장 중요한 콘텐츠인 경주마를 제공하는 게 마주들이다. 경마가 도박이 아닌 레저스포츠로 당당하게 인정받는 문화가 자리를 잡았으면 좋겠다.”
▼ 馬主, 아무나 못된다는데… ▼

■ 연소득 1억원 이상… 말 돌볼 경제력 필수, 전과-납세도 따져

아무나 마주가 될 순 없다. 마주가 되려면 한국마사회에 마주 등록을 신청해야 한다.

마사회는 마주등록심의위원회를 열어 등록 여부를 결정한다. 금치산자나 한정치산자는 마주가 될 수 없도록 법으로 정해놨다. 파산 선고를 받고 복권되지 않았거나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고 집행이 끝난 지 5년이 지나지 않은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경제 능력도 따진다. 개인 마주의 경우 2년간 연평균 소득이 1억 원 이상이고 평균 납부 재산세가 150만 원 이상이어야 한다. 마주 모집 공고 하루 전 기준으로 금융 자산이 10억 원 이상이어도 자격이 된다. 이런 기준을 두는 이유는 경주마 구입비와 관리비를 부담할 능력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다만 이 기준은 마주를 모집할 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법인이나 조합도 마주가 될 수 있다. 마주는 부정기적으로 모집한다. 경마장 내 마방 공간이 한정돼 있어 마주의 수를 무작정 늘릴 순 없다.

국산마의 경우 적게는 1000만 원대부터 최고 2억9000만 원까지 경주마의 몸값이 매겨져 있다. 개인 마주들이 구입하는 경주마는 대개 3500만∼4000만 원이다. 마주로 등록했더라도 6개월 안에 경주마를 구입하지 않으면 자격이 취소된다. 마주는 개인 소유의 말을 상금이 걸린 경주에 출전시키는 개인사업자다. 따라서 마주 등록 후 20일 이내에 세무서에 사업자등록도 해야 한다.

상금은 경주마 관리를 맡긴 조교사, 마필관리사, 기수와 함께 나눈다. 상금 분배율은 경기 과천시 서울경마공원의 경우 마주 78.68%, 조교사 8.84%, 마필관리사 7.48%, 기수 5%다. 부산·경남경마공원은 마주 78.53%, 조교사 16.49%, 기수 4.98%다.

개인이 경주마를 소유할 수 있게 된 건 국내에 개인마주제가 도입된 1993년부터다. 그전까지는 마사회 단일 마주제였다. 국내에는 올해 2월 말 현재 981명의 개인 마주가 있다.

이종석 기자 wing@donga.com
#경주마#경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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