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FOCUS]민가 출몰 호랑이 잡는 특수부대, 위세 하늘 찔러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월 26일 03시 00분


⊙ 무예 이야기… 조선의 정예부대 ‘착호군’

호랑이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옛사람들은 호랑이의 모습을 해학적으로 묘사하곤 했다. 까치와 호랑이를 함께 그린 조선시대 민화 ‘작호도(鵲虎圖)’.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동아일보DB
호랑이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옛사람들은 호랑이의 모습을 해학적으로 묘사하곤 했다. 까치와 호랑이를 함께 그린 조선시대 민화 ‘작호도(鵲虎圖)’.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동아일보DB
《 1980년대 난데없이 ‘호환(虎患)’이란 단어를 대중의 뇌리에 각인시킨 광고가 있다. 당시 최고의 볼거리였던 비디오테이프 앞부분에 반드시 들어 있던 공익광고였다. 불법 비디오의 위험성을 지적한 이 광고는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 전쟁 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으나…’라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했다. 호환이란 호랑이에게 물려가는 것이다. 마마는 지금은 사라진 질병인 천연두를 말한다. 지금이야 호랑이가 동물원에 갇혀만 있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대낮에 번화한 한양 도성 한복판에 출몰하기도 했다. 당시 호랑이는 가축은 물론이고 사람까지 물어가는 엄청난 공포의 대상이었다.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퍼지면 드넓은 도성의 대로에 개미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
특히 눈이 쌓여 먹잇감이 부족해지는 겨울이 되면 호랑이의 출몰은 더 잦아졌다. 심지어 궁궐에까지 호랑이가 나타나 국왕 시위군이 무기를 들고 급히 출동하는 사례도 빈번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전쟁보다 무서웠던 호랑이의 출몰

옛날 옛적 호랑이는 언제, 누구라도 물어갈 수 있는 ‘실존하는 공포’의 표상이었다. 조선시대에는 호환을 막기 위해 특별히 호랑이만을 전문적으로 사냥하는 부대를 창설하기에 이른다. 그 이름도 위풍당당한 착호군(捉虎軍)이다.

착호군은 용맹하고 무예실력이 특출한 군인들을 따로 선출한 후 그들에게 지속적인 무예훈련을 시켜 길러낸 정예병이었다. 만약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착호군은 오늘날의 ‘5분 대기조’처럼 곧장 출동했다. 그러고 끝까지 호랑이를 추적해 사냥했다. 돌아올 때는 늘 도성 한복판 대로에서 위세 좋게 행진하며 백성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았다.

무예실력이 뛰어난 착호군은 국왕의 총애를 받았다. 왕이 도성을 벗어나 선왕의 능에 인사를 가는 원행길에 오르면 착호군은 최측근에서 밀착경호를 담당했다. 또 정식 착호군이 되려면 어려운 시험(고참과의 창이나 활쏘기 대결)을 통과해야 했기에 그들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조선 초기 40명으로 시작한 착호군은 성종 대에는 440명 정도의, 단독 전투를 치를 수 있는 부대로 확대됐다. 이렇게 힘을 얻자 특권의식이 상당해졌다. 착호군 가운데는 번직(근무)이 아닌 날에 도성 거리를 활보하며 “내가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는 착호군”이라고 으스대거나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리는 자들도 나왔다. 하지만 포도청과 일반 군관들은 이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착호군의 위세가 이렇듯 하늘을 찌르니 그것을 악용한 사기 사건도 빈발했다. 지방에서는 풍채 좋은 한량들이 스스로를 착호군이라 칭하고 관아의 군마를 빌려 호랑이 사냥을 나서는 일까지 생겨났다. 조선시대에는 군마를 사용할 때 반드시 병조판서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착호군이란 말 한마디로 해결이 됐다니 그 위세가 능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또 착호군에게는 사냥터 인근 주민들을 구렵꾼(몰이꾼)으로 동원할 권한이 있었다. 산속으로 도망친 호랑이를 추적할 때면 야영을 빙자해 갖가지 접대를 받는 사례가 속출했다. 특히 산속에 호랑이가 숨어있는지 확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기르던 개를 미끼로 묶어두는 것이었기에 사냥터 주변 마을에선 개들의 씨가 마를 지경이었다.

이렇게까지 착호군의 위세가 높았던 본질적 이유는 무엇보다도 두둑한 포상금에 있었다. 일반 병사의 경우에는 전투에서 공을 세우거나 고된 훈련을 받아야 상을 받을 수 있었다. 전투나 고된 훈련이 일상적으로 있을 수는 없었다.

조선시대 모두의 공포이자 로또

반면 착호군의 창설 목적인 호랑이 사냥은 그 자체가 전투이자 훈련이었다. 한양 도성의 경우 심할 때는 한 달에 서너 번 호랑이가 출몰해 백성들이 길에 나다니지 못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착호군은 늘 비상대기 상태에 있었다. 막상 사냥이 시작되면 호랑이를 잡은 사람은 물론이고 호랑이를 맞힌 첫 번째 화살을 쏜 사람까지 두둑한 포상금을 받았다. 여기에다 잡은 호랑이가 크면 포상금 액수가 몇 배로 뛰었다. 착호군의 호주머니는 늘 두둑할 수밖에 없었다.

착호군이 아무리 호랑이를 잡아들여도 호랑이는 끊임없이 출몰했다. 나라에서는 특단의 대책을 마련하기도 했다. 호랑이를 잡아 바치는 노비는 신분을 평민으로 올려주고, 평민의 경우 평생 낼 세금을 모두 면제해 줬다. 그래서 너도나도 호랑이를 잡아 한밑천 잡아보려 애쓰는 ‘조선판 로또 열풍’이 불기도 했다.

그러나 산중의 왕이라는 호랑이를 잡는 것은 최고의 용기와 출중한 무예실력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경험도 중요해서 호랑이 사냥을 전문으로 하는 착호군을 당해낼 자가 없었다.

폭군으로 이름을 날린 연산군은 호랑이 사냥을 특히 좋아했다고 전한다. 그는 임금의 전용 사냥터인 금원(禁園)에서 수시로 착호군과 사냥에 나섰다. 그때마다 인근 백성들을 몰이꾼으로 동원해 엄청난 원성을 샀다.

최근 언론을 통해 “호랑이가 없는 한반도에서 담비가 최고의 포식자로 군림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담비마저 없어지면 옛말 그대로 토끼가 왕 노릇을 할지 궁금하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면 절대 강자도 바뀌는 것이 역사다.

최형국 한국전통무예연구소장·역사학 박사
#O2#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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