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브이’ 아버지 김청기 “日 마징가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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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1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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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2/인터뷰]‘백설공주’에 충격 받은 김청기, 만화영화 외길로⊙ 내 인생을 바꾼 영화

1964년 무렵이었던 것 같다. 서울 충무로 대한극장에 미국 월트디즈니의 애니메이션 ‘백설공주’가 걸렸다.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데려온 부모들로 극장 앞은 인산인해였다. 극장으로 발걸음을 한 건 그저 호기심에서였다. 만화로 먹고사는 사람이 만화영화를 보러가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었다. 그저 이전 작품들인 ‘미키마우스’나 ‘도날드 덕’과 비슷한 수준일 거라 여겼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의 한 시간은 그의 생각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한마디로 충격적이었다. 오로지 그림으로 표현했음에도, 등장인물의 동작은 물론이고 감정까지도 살아있는 듯 생생했다. 음악도 현란했다. 극장 밖으로 나왔을 땐 오로지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만화영화라는 게 이런 거구나. 나도 이걸 해야겠다.’ 스물 셋 김청기(72·글로벌사이버대 석좌교수·사진)는 그렇게 만화가 아닌, 만화영화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러고 열 두해가 지난 후 로보트 태권브이가 탄생했다.

만화작가

베스트셀러 작가까진 아니었어도 그가 그린 만화는 곧잘 팔렸다. 1960년경에 그린 첫 작품은 펜싱을 소재로 한 미국 흑백영화 ‘풍운의 오프린’에서 줄거리를 따왔다. 그땐 저작권이나 판권의 개념이 전무했다. 있었더라도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그가 알 리가 없었지만…. 영화를 본 날 저녁 그는 곧바로 다락방으로 기어 올라갔다. 그러곤 꼬박 한 달을 처박혀 있었다. 천장이 낮아 앉은 채로도 허리를 펴기 힘든 그런 곳이었다. 낮이나 밤이나 촛불 하나에 의지해 그림을 그렸다. 살짝 조는 사이 앞 머리카락과 눈썹을 태운 적도 부지기수였다.

김청기 감독이 겨울비가 흩뿌리던 23일 서울 중구 애니메이션센터에 늠름하게 선 로보트 태권브이 앞에서 ‘브이’자를 그렸다. 그는 로보트 태권브이의 나이가 창작 당시 그의 나이(만35세)보다 많아졌다며 웃음을 지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김청기 감독이 겨울비가 흩뿌리던 23일 서울 중구 애니메이션센터에 늠름하게 선 로보트 태권브이 앞에서 ‘브이’자를 그렸다. 그는 로보트 태권브이의 나이가 창작 당시 그의 나이(만35세)보다 많아졌다며 웃음을 지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 ‘태권브이’ 개봉에 구름 관중… 어린이의 영원한 영웅 되다 ▼

● 김청기 감독의 삶을 바꾼 영화

영화를 단 한 번 보고 그린 것치곤 80여 쪽짜리 단행본은 꽤 완성도가 높았다. 함께 만화를 그리던 친구도 “네 만화를 보면 영화의 장면 장면과 정말 똑같다”면서 칭찬했으니까. 자신감을 갖고 만화 전문 월간지 ‘만화세계’를 찾아갔다. 편집장은 “그림 좋네. 애썼다”고 했다. 그런데 웬걸. 정작 출판은 못 해준다는 것이었다. 이유인즉슨 만년필 잉크로 그린 그림은 인쇄가 안 된다고 했다. 바로 돌아서 나왔다. ‘안 되면 할 수 없지 뭐. 다시 그려야겠네.’ 그땐 그랬다. 꿈이 있었으니까, 그 정도로 좌절하지 않았다. 가르쳐준 대로 먹물로 다시 똑같이 그려냈다. 아리랑문고에서 나온 ‘무적의 오프린’이었다.

책이 좀 팔리자 독수리문고에서 그를 스카우트했다. 지금 말로 치자면 전속작가 비슷한 것이었다. 그곳엔 스무 살 안팎의 또래 만화가들이 꽤 있었다. 이덕성이란 친구는 중학교 3학년 때 벌써 단행본을 냈다고 했다. 그러니 그가 특별히 눈에 띄는 천재 만화가는 아니었던 셈이다. “나는 그땐 범작(凡作) 정도만 냈지. 크게 히트하진 못했어. 그래도 ‘내 것’을 해야 되겠다는 신념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해.”

그런데도 벌이가 좋았다. 공무원인 큰형 월급의 3배를 받을 정도였으니까. 전업작가 생활을 잠깐 하다 대학에 들어갔다. 당시 유일한 예술대학인 서라벌예대(2년제)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그림 시장이 존재하지 않았으니 난다 긴다 하는 화가들도 입에 풀칠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교수들은 만화로 곧잘 돈을 버는 제자를 신기해하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의 고민은 다른 곳에 있었다. 만화에 대한 편견이었다. 신문에 아이들의 ‘비행’ 관련 기사 한 줄만 나도 세상은 만화가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나쁜 건 모두 만화를 봐서라고 했다. 그게 고정관념처럼 돼 버렸다. 아는 사람들도 “코 묻은 돈을 번다”며 은근히 깎아내렸다. 만화는 저급한 문화고, 만화가는 그런 저급한 문화를 확산시키는 사회악이었다. 사전심의도 갈수록 까다로워졌다. 욕은 고사하고 ‘이 자식’이란 말도 못 썼다. 칼을 들이대는 장면도, 사람에게 총을 겨누는 것도 허용이 안 됐다. 그는 회의에 빠졌다. 어린 시절부터 그의 유일한 놀이이자 탈출구였던 만화가 거꾸로 그를 옥죄고 있었다.

전쟁은 그가 아홉 살이던 때 아버지를 앗아갔다. 아버지는 막내였던 그가 하는 짓이라면 늘 응원했다. 남의 집에 낙서를 해도, 화장실 벽마다 그림을 그려도 아버지는 그의 편에 섰다. 서울수복 일주일 전 납치된 아버지는 그 뒤로 연락이 끊겼다. 의정부에서 본 사람이 있다고 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이미 쉰의 나이에 다리까지 불편해 북한군이 데려가다 쏴 죽인 게 분명했다. 청계천과 남산 등지에 널린 시체들을 온 가족이 찾아다녔지만 아버지가 신고 다니던 농구화는 끝내 볼 수가 없었다. 어린 김청기는 그때부터 말을 잃었다. 그러곤 그림만 그렸다. 하얀 도화지 위에 그가 원하는 대로 그려가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그게 나한테는 모든 것에 대한 보상이었지. 공책이고 교과서고 여백만 있으면 그렸으니까. 종이 위에 내 세계가 있었던 거야.”

그에겐 만화가 그런 것이었다. 그가 가진 전부이자 소통의 수단이었다. 그런 만화 때문에 곱지 않은 시선을 받는다는 건 참기 힘든 일이었다.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아버지까지 부정당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혼란에 빠졌다. 미국에서 건너온 백설공주가 아니었다면 그는 만화가라는 직업조차 내던지려 했을지도 모른다.

만화영화

백설공주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세기상사에서 만화영화 제작을 한다는 얘기가 들렸다. CF작가로 이름을 날리던 신동헌 감독을 영입해 ‘홍길동’을 만든다고 했다. 1967년 개봉한 그 영화는 세간의 주목을 끌었다. 한국의 첫 장편 애니메이션이었으니 상징성도 있었다. 관객도 꽤 들어 한국 만화영화의 시장성을 확인해 주기도 했다. 성공적 결과에 고무된 세기상사 측은 다음 작품으로 ‘손오공’을 선택했다. 그러면서 영입한 이가 유명 산업디자이너 박영일 씨였다.

박 씨는 젊은 만화작가였던 그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쾌재를 불렀다. 꿈을 실현시켜 줄 동반자를 만난 것이니 당연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위기가 빨리 찾아왔다. 주로 디자이너들로 구성된 ‘손오공 팀’의 작품 방향은 만화로 잔뼈가 굵은 그의 생각과 많이 달랐다. 상당 부분 텃세도 느꼈다. 만화가의 눈에 디자이너들이 만들어내는 만화영화는 뭔가 어색했다. 백설공주에서 봤던 ‘생생함’이 없었다. 그래서 두 달 만에 자리를 옮겼다. TBC에서 ‘황금박쥐’라는 작품을 만들었는데 거기에 참여하기로 한 것이었다. 월 8000원에서 1만3000원으로 월급도 올랐다. 쌀 한 가마니에 9000원 하던 시절이었으니 적은 돈은 아니었다. 그런데 거기서도 덜커덕 걸리는 게 있었다. 황금박쥐는 일본에서 기획해 스토리보드는 물론이고 캐릭터 디자인까지 완성된 상태였다. 한국에는 이른바 그림 하청작업을 맡긴 셈이었다. 그의 ‘신념’에 반하는 것이었다. 결국 3개월 만에 또다시 뛰쳐나왔다.

그러곤 손오공 팀에 다시 합류했다. 박 씨는 한 번 배신했던 열한 살 아래 동생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 고마움 때문에라도 그는 최선을 다했다. 손오공은 1968년 개봉했다. 흥행에선 재미를 보진 못했다. 한국 첫 장편 애니메이션이었던 ‘홍길동’에는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관객이 몰렸지만 손오공은 달랐다. 그 후 만든 ‘황금철인’과 ‘보물섬’도 비슷했다. 그래도 그에겐 소중한 기회들이었다. 20대 청년 김청기는 그렇게 자기만의 만화영화를 만들겠단 꿈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고 있었다.

박 씨와 그는 질긴 인연을 이어갔다. 부침도 심했지만, 둘은 늘 함께였다. 세기상사를 나와 ‘문화영화사’에 함께 들어갔고, 1971년엔 ‘선진문화’라는 종합광고대행사를 아예 만들어버렸다. 닥치는 대로 돈벌이에 나섰다. 정부나 기업을 홍보하는 기록영화, 문화영화를 많이 만들었지만 꿈이 있었기에 버텨냈다. ‘라면땅’ ‘캉캉스타킹’ ‘감기약 판토’ 같은 TV 광고용 애니메이션들도 그때 만들었다. 둘은 항상 서로를 다독였다. “빨리 돈 모아서 멋진 장편 만화영화 하나 만들어보자.” 그런데 삶이란 참 가혹했다. 선진문화도 2, 3년을 버티지 못하고 공중분해됐다. 게다가 평소 고혈압으로 고생하던 박 씨는 아예 집에서 요양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홀로서기를 해야 했다. 그는 용산에 ‘키 프로덕션’이란 회사를 차리고 꿈을 불태웠다. 그때 만든 시나리오가 ‘똘이장군’이었다. 그러나 직접 제작비를 댈 능력은 안 됐다. 정부 지원금에 기대를 걸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그도 점점 지쳐갔다.

로보트 태권브이

만화영화를 포기해야 하나 고민하던 무렵 박 씨가 다시 그를 찾았다. 1년 만이었다. 마치 만화에 대한 후회가 밀려들 때 백설공주가 나타나 새로운 꿈을 건넨 것처럼. 오랜 칩거생활을 끝낸 박 씨와 함께 ‘서울동화’를 설립했다. 1975년이었다. 해태 아카시아 껌, 선일선풍기 등의 CF를 만들면서 다시 자금을 모았다. 그걸로 장편 만화영화를 만들기로 의기투합했다. 그런데 지친 그를 일으켜 세웠던 박 씨가 갑작스레 세상과 이별했다. 다시 뭉친 지 1년도 안 됐을 때였다.

김청기는 다시 혼자가 됐다. 그렇지만 이제 더 물러설 곳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직원 50명을 모아 당장 작업에 들어갔다. 그즈음 아이들이 가장 열광했던 건 마징가였다. 대부분 사람들이 한국의 로봇인 줄 알았지만 사실은 일본의 캐릭터였다. 아이들이 자라 자신의 전부였던 마징가가 일본 것인 줄 알았을 때 얼마나 큰 허탈감을 느낄까. 그는 ‘우리 것’을 만들고 싶었다. 자신도 있었다. 그러나 한술에 배부를 순 없었다. 직원들이 그려온 로봇의 그림에서 마징가의 느낌을 빼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 “마징가는 엄청 그림이 복잡해. 그리기가 어려우니 동작을 단순하게밖에 설계를 못한 거야. 우린 반대로 ‘단순함’에 승부를 걸었지.” 인간형 로봇에 태권도를 접목하자는 아이디어는 화룡점정을 찍었다. 로봇이 발차기, 정권 찌르기, 격파 이런 걸 하면서 적들을 부숴버리면 정말 통쾌하겠다 싶었다. 스토리 구상에만 꼬박 한 달이 걸렸다.

1976년 여름, ‘로보트 태권브이’란 간판이 극장에 내걸렸다. 대히트였다. 당시 대한극장에 21만, 서울극장은 7만 명이 몰려들었다. 20일 안팎의 개봉기간에 그만큼 많은 흥행기록을 쓸지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태권브이는 지방에서도 엄청난 흥행몰이를 했다. 그해 여름방학엔 태권브이가 아이들을 지배했다. 그런데 정작 그에겐 빚만 남았다. 당초 그림 1만8000장, 상영시간 1시간 10분을 계획했지만, 제작하면서 3만2000장, 1시간 28분으로 늘어난 탓이었다. 제작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회삿돈을 모두 쓰고, 흑석동 집을 담보로 빚까지 얻어야 했던 것이다. 그래도 그에겐 세상에 두려울 게 없었다. 지인들에게 돈을 꾸러 다니던 아내에게도 미안하다는 말 대신 “그래도 내 이름값 하나는 벌었지 않느냐”고 했다. 그해 겨울, 이듬해 여름 로보트 태권브이 2, 3탄을 연속해서 내놓으면서 그는 어린이들의 ‘영웅’이 됐다. 4년 전 써뒀던 ‘똘이 장군’(1978년 개봉)으로 남은 빚도 모두 갚았다.

만화가 김청기는 그렇게 만화영화감독으로 세상에 우뚝 섰다. 앞으로도 한국 문화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이름, 태권브이의 아버지 김청기로 말이다.


[채널A 영상] ‘콘텐츠 경쟁력’ 가진 만화들 대중문화 움직인다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O2#인터뷰#김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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