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 한줄]내 자리는 어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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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9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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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마다 어울리는 자리가 있는 거거든요.”

­―드라마 ‘연애시대’(SBS·2006년)
그녀의 이름은 유지호(이하나). 병원 도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스스로 “나는 아르바이트 인생”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농담을 한다. 병원 도서관도 형부 친구 공준표(공형진)의 ‘빽’인지 ‘소개’인지 정확히 드러나지 않는 경로를 통해 들어갔다. 그런 지호는 언제나 자동차 뒷좌석을 고집한다. 하루는 그녀를 뒤에 태우고 집으로 돌아가던 준표가 기어이 한 소리를 한다. “그나저나 너는 왜 밤낮 뒷자리에 앉아 있는 건데? 건방지게. 너, 앞으로 안 와!” 지호가 되레 큰소리를 친다. “사람마다 어울리는 자리가 있는 거거든요!”

28세의 K. 회사원이 된 지 1년 3개월이 지났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직장에, 한 달 월급은 세금을 떼고도 290만 원.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 대학교 졸업 후 1년이라는 백수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장남인지라 일자리를 소개해줄 ‘형부(그의 입장에선 매형인가?) 친구’조차 없었다. 대학 입학도, 회사 입사도 사회가 정해놓은 기간보다 꼭 1년씩이 더 필요했다. 따지고 보면 그리 늦은 것도 아니다. 그보다 1년 먼저 대학에 들어온 ‘선배’가 여전히 모교 도서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K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자리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8월부터 그의 출근 시간은 1시간 늦춰진 오전 10시가 됐다. 퇴근 시간은 오히려 빨라져 오후 5시면 집으로 돌아간다. 이제 K가 아침마다 꼬박꼬박 출근 도장을 찍는 곳은 서울의 한 체육관. 오전 시간은 회사 선배들과 그곳에 앉아 이런저런 영양가 없는 이야기를 나누는 데 거의 대부분을 흘려보낸다. 점심은 단체 주문 도시락. 오후에는 선배들이 불러 온 사람들이 진행하는 ‘교육’을 듣는다. 지난주 목요일에는 ‘비정규직의 실태와 문제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비정규직도 아닌 K의 업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내용들이었다. 말로만 듣던 파업이 이런 것인가 싶기도 하다.

회식 자리에서 한 선배가 ‘NL(민족해방)’과 ‘PD(민중민주)’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NL과 PD라는 단어를 처음 배웠다. “대학 다닐 때에도 난 운동권에 관심조차 없었잖아. 선배한테 그런 이야기 싫어하니까 하지 말라고 했어.” 커다란 카메라 하나를 어깨에 걸치고 학교 잔디밭을 가로지르던 K가 말했다.

지호가 왜 뒷자리가 자신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늘 준표의 뒷자리를 고집했던 그녀는 결국 준표의 ‘옆자리’를 선택했다. 그녀가 자신에게 어울리는 자리라고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저 행복해 보였으니 된 것이다. 뒷자리에 앉아 쫑알대던 그녀의 모습만큼이나 준표의 옆자리도 무척 자연스러워 보였으니, 그 자리도 지호에게 어울린다고 믿고 싶을 뿐이다. 지호와 준표가 늘 노심초사하던 ‘연애시대’의 남녀 주인공은 자신들의 자리를 찾아가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됐다. 마지막에는 유방암까지 걸렸던 지호가 자신의 자리를 끝내 찾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정신 건강에 해롭다.

드라마에서는 언제나 모두들 자신에게 어울리는 자리를 찾아간다. 적어도 시청자들에게 그렇게 믿을 수 있는 ‘희망’은 남겨준다. 그리고 K도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서울역 앞 집회 현장이나 체육관과는 조만간 이별을 하게 될 것이다. 다시 그에게 어울리는 번듯한 회사의 사무실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득 궁금해진다. 그곳이 진정 그에게 어울리는 자리일까. 자신에게 어울리는 자리를 찾겠다며 오늘도 도서관을 찾는 이들은 드라마의 결말처럼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 있을까.

“대학만 잘 가면 끝일 줄 알았어. 그런데 아니었지. 한 번 더 속는 셈 치고 취업만 하면 끝난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야. 왜 이러고 살아야 되는지 모르겠다.”

K의 말에 내 발끝을 내려다본다.

동그라미 동아일보 기자. 지호처럼 앞자리보다 뒷자리가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desdemona9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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