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동하는 ‘현대미술의 수도’ 카셀, 20년 만에 한국작가 손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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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6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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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3회 독일 카셀 도쿠멘타’ 150명의 작가들 100일간의 외침

카셀 도쿠멘타 13의 야외 전시장인 카를사우에 공원에 선보인 중국작가 쑹둥의 ‘Doing nothing garden’. 쓰레기와 흙 더미를 쌓아올린 인공적 언덕 위로 식물이 자라는 정원이 생겨났다.
카셀 도쿠멘타 13의 야외 전시장인 카를사우에 공원에 선보인 중국작가 쑹둥의 ‘Doing nothing garden’. 쓰레기와 흙 더미를 쌓아올린 인공적 언덕 위로 식물이 자라는 정원이 생겨났다.
《 9일(현지 시간) 독일 중부의 소도시 카셀에서 개막해 9월 16일까지 100일간 열리는 제13회 카셀 도쿠멘타(Kassel Documenta 13)는 세계 최고 권위의 국제현대미술제다. 5년마다 열리는 행사로 올해는 55개국 150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한국 작가로는 1992년의 육근병 씨에 이어 문경원(43)-전준호(43) 팀, 양혜규 씨(41)가 20년 만에 초청받았다. 강렬한 주제의식과 시각적 표현을 결합한 작업으로 현지에서 주목받은 작가들을 소개한다. 》
오후 10시가 되도록 해가 지지 않는 6월의 카셀. 전시장과 거리에서 런던 테이트모던의 니컬러스 세로타 관장, 뉴욕 현대미술관(MOMA)의 글렌 로리 관장, 전설적 아트 딜러 메리언 굿맨, 스위스의 컬렉터 울리 지크 등 미술계 명사들을 종종 마주치게 된다. 도쿠멘타 덕분에 카셀은 5년 주기로 세계 현대미술의 수도로 탈바꿈하기 때문이다.

‘미술 올림픽’으로 불리는 베니스 비엔날레가 경쟁 시스템을 통해 화려함을 과시하고 대중적 인지도를 높인 데 비해 도쿠멘타는 학구적 진지함으로 국제 미술 최고 이벤트로 자리매김했다. 출발 자체가 전쟁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한 성찰에서 비롯된 만큼 미학적 측면보다 사회 정치적 이슈를 부각하거나 행동과 실천을 중시한 작품이 많다. 주전시장 프리데리치아눔 미술관 앞에 서 있는 나무 두 그루가 그 증거다. 현대미술의 거장 요제프 보이스(1921∼1986)는 1982년 도쿠멘타에서 ‘7000그루 떡갈나무 심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첫 나무를 심고 기념비처럼 현무암을 짝 지운 환경친화적 행위예술은 시민의 참여로 계속됐고 그의 사후 1987년 도쿠멘타에서 마지막 나무를 심으면서 완성됐다.

올해도 도쿠멘타는 예술 혹은 예술 아닌 것을 구별하지 않고 다양한 영역의 학문과 사회운동을 끌어들였다. 물리학 생물학 철학 등을 통섭한 것은 물론이고 스페인에 이어 모로코에 합병된 서사하라사막 지역의 독립을 촉구하는 음식나누기 프로젝트 등 실제 운동가들이 참여했다. 기자회견에서 독립큐레이터 출신 총감독 캐럴린 크리스토프바카르기예프 씨(55)는 “이번 도쿠멘타를 아우르는 하나의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참여 작가를 100명 이내로 선보였던 예전과 달리 150명으로 늘렸다. 살바도르 달리와 조르조 모란디 등 작고한 화가부터 양자역학과 빛을 연구하는 과학자도 그 안에 포함됐다.

전시도 전통적 공간뿐 아니라 다양한 박물관, 숲, 나치 시대의 거대한 벙커 등 도시 전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선보여 보물찾기를 하듯 지도를 들고 발품 팔 각오를 해야 한다. 자연사박물관에는 흙과 볍씨를 활용한 설치작품을, 천문과학박물관에는 기술과 시간의 문제를 다룬 영상작품을, 그림형제 박물관에는 중세 기사를 모티브로 한 작품을 배치하는 등 역사적 공간의 맥락에 걸맞은 작품을 연결해 인상적이다. 참여 작가 중 산업화 이후 인간을 구속해온 표준화된 시간을 주제로 삼은 윌리엄 켄트리지의 영상설치작품, 드넓은 풀밭에 폐기물을 쌓고 식물을 심어 인공적 산을 만든 중국 작가 쑹둥(宋冬), 텅 빈 전시장을 산들바람으로 채운 라이언 개리건 등이 주목받았다.

인류학과 고고학 등 온갖 분야를 포함하면서 전시의 전형성에서 탈피했다는 호평과 함께 기존 비엔날레와 전시를 죄다 뭉뚱그린 종합선물세트라는 비판도 나온다. 2010년 광주비엔날레의 예술감독을 거쳐 2013년 베니스 비엔날레 총감독으로 임명된 마시밀리아노 조니 씨는 “규모가 크다는 것이 도쿠멘타의 힘이면서 약점”이라며 “작가도 많고 이야기도 다양해서 주제의 집중력은 약화된 것 같다”고 평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으로 파괴된 카셀에서 수거한 불타버린 종이책과 탈레반 정권이 파괴한 바미안 불상의 잔해로 새긴 돌로 만든 책을 나란히 전시한 마이클 라코비츠의 설치작품은 도쿠멘타에서 제기한 근원적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자기 파괴의 궤적을 되풀이하는 역사 앞에서 예술은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성을 숙고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파멸이 아닌 미래로 가기 위해선 우리 스스로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산업화는 진행형” 과거아픔 건드려 현재를 일깨우다

■ 양혜규 ‘진입: 탈-과거시제의 공학적 안무’ - 카셀 중앙역 화물역사에 전시


카셀 중앙역의 화물역사에 길이 45m에 달하는 대규모 작품을 설치한 양혜규 씨.
카셀 중앙역의 화물역사에 길이 45m에 달하는 대규모 작품을 설치한 양혜규 씨.
나치의 군수물품 수송열차가 분주하게 오갔던 카셀 중앙역의 화물역사는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고 방치돼 폐허의 풍경같이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그 철로 위에 매달린 수십 개의 검은색 블라인드가 정적을 깨뜨리는 소음과 함께 열렸다 닫히기를 되풀이한다. 군사 퍼레이드나 카드 섹션처럼 일사불란 작동하는 블라인드는 위협적인 기계 생명체처럼 다가온다.

양혜규 씨의 총길이 45m의 대규모 설치작품(‘진입: 탈-과거시제의 공학적 안무’)은 시청각 요소를 통합하면서 선진국부터 개발도상국까지 ‘산업화’를 거쳤던 혹은 거치고 있는 인류의 공동적 체험과 기억을 건드린다. 획일성으로 개인을 복종시킨 산업화를 보편적 화두로 삼은 작품이다. 블라인드의 안무는 한때 번성했다가 몰락한 장소의 이미지와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독일 방송과 잡지에 연이어 보도됐다.

“여기 처음 왔을 때 장소의 강한 힘에 사로잡혔다. 근대사회는 유토피아에 대한 낙관을 바탕으로 ‘더 많이, 더 빨리, 더 좋게’를 추구하는 산업화를 동반했다. 과거의 산업적 영광과 오늘의 초라한 현실이 대비되는 기차역을 보면서 산업화는 아직도 우리가 고민해야 할 현재 시제의 과제임을 말하고 싶었다.”

그는 모터로 블라인드를 작동하는 기술적 도전에 이어 무대 연출의 모험도 시도했다. 7일 오후 10시 카셀주립극장에서 프랑스의 지성파 배우 잔 발리바의 모노드라마로 선보인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사랑의 불가능성에 대한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을 영상, 오브제, 느린 움직임으로 연출한 공연에는 다쿠멘타의 총감독, 정형민 국립현대미술관장,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 등 900여 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파리의 샹탈 클루제 갤러리 클루제 대표는 “그는 철학적 태도로 작품에 접근하면서 한국 문화의 요소에 세계의 보편적 요소를 엮어 새로운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탁월한 작가”라고 말했다.

2009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전시에 이어 추상성과 모호함, 담대함과 섬세함의 이중주 같은 설치와 무대작업을 도쿠멘타에 선보이며 세계무대에 자신을 각인시킨 작가. 그는 여전히 자기 복제를 거부하는 치열함으로 스스로를 담금질하고 있다. “한발 더 나아갔는지, 재탕하고 있는지는 자신이 잘 안다. 일관성과 경계의 확장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이 나의 일이다. 늘 고삐를 늦출 수 없다.”
▼ “인간, 잘 살고있나” 책-옷-영화속에서 미래세계로의 여행

■ 문경원-전준호 ‘뉴스 프롬 노웨어’ - 도쿠멘타 할레에 전시


영상과 설치작품, 단행본으로 구성된 프로젝트를 발표한 문경원 씨(왼쪽)와 전준호 씨.
영상과 설치작품, 단행본으로 구성된 프로젝트를 발표한 문경원 씨(왼쪽)와 전준호 씨.
모든 것은 2007년 타이베이행 비행기 안에서 시작된 일이다. 동갑내기 작가 문경원, 전준호 씨는 우연히 옆 좌석에 앉아 대화를 나누던 중 지금 세상에서 예술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사회적 기능과 역할을 알아보는 공동작업을 해보자는 데 의기투합했다. 그 결실이 이번에 처음 공개한 ‘뉴스 프롬 노웨어(News from nowhere)’ 프로젝트다.

이들은 주 전시장 중 하나인 도쿠멘타 할레에서 지구 종말 직전의 예술가와 그 이후 새롭게 태어난 신인류를 조명한 2개 채널 영상작품 ‘세상의 저편’, 건축 패션 등 국내외 전문가들과 협업으로 완성한 설치작품 ‘공동의 진술’, 철학 종교 등 각계 인사와의 인터뷰와 프로젝트 과정을 담은 책 등 3가지로 구성된 작업을 선보였다.

“미술과 다른 분야의 접점을 찾아보고 싶었다. 2년 반을 준비하면서 과연 되겠냐는 주변의 회의적 시선이 있었는데 좋은 결과가 나와 기쁘다.”(전)

예술의 지향점과 다가올 미래 사회를 그려보는 이들의 책 작업엔 문학의 고은 시인, 과학의 최재천 정재승 교수 등이 참여해 대화를 나눴다. 설치작품으로는 일본 건축가 이토 도요, 디자인그룹 타크람에서 만든 난민을 위한 공동주택 모형과 일상 용품, 디자이너 정구호 씨의 미래 의상이 협업으로 탄생했다. 이를 기반으로 이정재 임수정 씨가 개런티 없이 출연한 2편의 단편영화가 완성됐다. 다양한 장르를 넘나든 작품의 형식과 짜임새 있는 내용, 주제에 대한 집중력 측면에서 시대 변화를 읽고자 하는 도쿠멘타의 정신을 충실하게 드러낸 수작으로 꼽을 만하다.

“프로젝트 제목은 윌리엄 모리스의 소설에서 따왔다. 19세기 영국에서 100년 후로 가상여행을 떠나며 당대를 비판했으나 그가 상상했던 20세기 역시 유토피아는 아니었다. 종말 이후의 세상을 통해 이를 재반성하고 성찰하고자 했다.”(전) “작업 결과보다 두 사람의 시각에서 출발했던 사소한 질문을 여러 분야 사람들과 공유하는 과정 자체가 보람찬 성과였다.”(문)

예술의 울타리를 벗어난 협업을 추구하며 겪었던 숱한 속앓이에 이어 문 씨는 작품 설치 중 다리 부상까지 입었다. 그야말로 우여곡절의 연속이었으나 두 사람은 다시 출발점 앞에 선 듯 단단한 각오를 밝힌다. “인간은 제대로 살고 있는가, 우리의 태도와 행동은 달려져야 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으로 우리 작업이 받아들여지면 좋겠다.”(전) “모든 과정을 담은 책은 바로 우리의 여행기다. 도쿠멘타 후에도 여행은 계속될 것이다.”(문)

:: 카셀 ::

독일 헤센 주에 자리한 인구 20만 명의 소도시다. 전차 등 군수 공장의 중심지였던 이곳은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집중 폭격으로 폐허로 변했으나 1955년 화가 아르놀트 보데의 주도 아래 도쿠멘타를 창설한 이후 예술을 통해 도시는 새롭게 부활했다. 요제프 보이스 등 거장이 곳곳에 남겨 놓은 작품들 덕분에 도시 전체는 살아 있는 미술관으로 바뀌었다. 제12회 도쿠멘타는 관객 75만 명을 기록했다.

카셀=글·사진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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