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민미술관의 텅 빈 전시관에서 사진을 찍는 동안 김수현은 “아, 음음, 하하하” 같은 혼잣말인지, 허밍인지 모를 소리를 계속 내면서 스스로 분위기를 띄웠다. 어색함에 대한 돌파구인 듯도, 스스로에 대한 주술인 듯도 보였다. 그는 “즐겁게 하려고요”라고 말했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꿈꾸는 것 같아요.”
그럴 만도 하다. 사실상 처음 주연한 작품이 전국 시청률 40%를 넘고, 광고도 10편 넘게 찍었다. 차기작 섭외도 물밀 듯 들어오고 있다. 15일 종영한 MBC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의 히어로 김수현(24) 얘기다.
“산골 촬영장까지 어머님 팬들이 찾아오셔서 챙겨주셨어요. 신기하고 기분이 되게 좋더라고요. ‘밥차 공양’도 난생 처음 받아 봤어요. 그때 느꼈죠. 인기란 걸.” 20일 동아일보를 시작으로 그는 30여 개 매체와 인터뷰를 했다.
‘해품달’ 이훤 역에 섭외될 때 그는 오늘날의 인기와는 거리가 먼 신인이었다. 캐스팅 당시에도 제작사보다 그가 더 적극적이었다.
“드라마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원작 소설을 사 봤는데, 처음 보고 완전히 ‘달려들었’어요. 소설 속 이훤을 내가 재생시켜보고 싶다는 욕심이 컸죠. 해품달을 책으로 만났을 때 훤에게서 만화 ‘창천항로’(삼국지를 조조 중심으로 풀어낸 일본 만화)의 조조를 떠올렸어요. 훤은 조조처럼 영악하거든요. 영악한 캐릭터가 욕심났어요. 제 것으로 만들고 싶었죠. 조조가 되고 싶어서, 그래서 훤이 되었죠.”
그가 여주인공 연우 역의 한가인보다 어린 점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6세나 많은데, 사랑할 수 있겠나”는 제작진의 질문에 김수현은 “한가인 씨가 맡은 역할을 사랑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는 한가인과의 나이차에 대해 “캐릭터로 만났기 때문에 나이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고 했다.
오히려 그보다는 훤이라는 캐릭터 자체를 잡기가 무척 어려웠다고 그는 말했다. “목소리 톤과 대사에서 강조점을 어디에 둘지, 한 가지 대사를 여러 번 반복해가면서 훤에게 맞는 목소리와 톤을 찾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참고하려고 ‘뿌리 깊은 나무’(SBS 사극)도 봤지만 제게 맞는 톤을 찾진 못했어요. 재생이 안 되니 너무 답답했어요.”
돌파구를 열어준 사람은 같은 기획사(키이스트) 선배 배용준이었다. “따로 만들어내려 하지 말고 네 안에서 네가 가지고 있는 것들로, 자신 있는 소리를 찾아서 표현하면 충분하다” 이 말을 듣고 그는 부담을 덜었다고 했다.
김수현은 고등학교 때 연극을 하면서 연기를 처음 배웠다. 그래서인지 발성과 발음 등 연기의 기본기가 탄탄한 편으로 꼽힌다. 촬영 전 캐릭터를 해석하는 데도 각별한 정성을 쏟는다. ‘드림하이’(2011년) 삼동 역을 맡았을 때는 평상시에도 경상도 사투리를 썼을 정도다.
“고민을 많이 해서 역할을 제 것으로 만들면 어떤 충격이 와도 중심을 잡을 수 있어요. 촬영 시작하면 어떤 날은 대본이 늦게 나오기도 하고 여러 상황이 생기는데 그렇다고 이상하게 연기할 수는 없잖아요. 처음에 중심을 잘 잡아 놓아야 연기가 흔들리지 않아요.”
훤을 워낙 깊이 새겨놓아서인지 그는 아직도 몸이 훤을 기억한다고 했다. “2시간 자다가 갑자기 잠을 깨요. 촬영현장 가야지, 하면서요. 몸이 먼저 아는 거죠. 하하.”
그는 좋아하는 배우로 영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2009년)에서 악랄한 유대인 사냥꾼인 나치독일 장교로 출연한 크리스토프 왈츠를 꼽았다. 이유가 독특했다. “이 배우가 말을 하면 궁금해지는 거예요. 그 모습을 계속 보고 듣고 싶은 욕심이 생겨요. 말하는 게 노래하는 것 같거든요. 운율이 굉장히 좋아요. 말하는 데 완전히 정신을 다 뺏겨 버려요. 그런 배우가 되고 싶어요.”
‘비디오’가 강해서일까, ‘오디오’가 좋은 배우에 대한 동경이 그는 강했다. 자신의 한계에 대해서도 냉철한 분석을 내놨다. “해품달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연기 폭의 한계를 만났어요. 정치하는 장면에서는 사람들을 휘두르는 에너지와 힘이 많이 부족하다고 느꼈어요.”
스물넷의 청년치고는 사려가 깊다는 생각에 ‘김수현은 누구인지 직접 정의해 달라’고 물었다. 고민하더니 그는 다음과 같은, 답 아닌 물음을 내놓았다.
“나는 아직 소년인가?”
소년에서 성인으로 화려한 신고식을 치른 지금, 이 자문(自問)에 대해 김수현이 앞으로 보여줄 답변이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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