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슈]주고받는 情 속의 찜찜함, 데이 마케팅의 불편한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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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3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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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런타인, 화이트, 빼빼로, 삼겹살… 넘쳐나는 ‘특별한 데이’

화이트데이를 며칠 앞둔 8일, 서울의 한 할인점 특별매장에 관련 상품이 쌓여 있다. 사람들은 이런 곳에서 애인과 부모님, 심지어 직장 상사에게 줄 선물까지 고른다. 속으로는 ‘왜 이런 날이 생겼지?’란 생각을 하면서도 말이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화이트데이를 며칠 앞둔 8일, 서울의 한 할인점 특별매장에 관련 상품이 쌓여 있다. 사람들은 이런 곳에서 애인과 부모님, 심지어 직장 상사에게 줄 선물까지 고른다. 속으로는 ‘왜 이런 날이 생겼지?’란 생각을 하면서도 말이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지현 씨(43)는 프랑스의 유명 요리학교 르코르동블뢰 출신 쇼콜라티에(초콜릿 공예가)다. 2005년 귀국 후 인터넷을 통해 수제 초콜릿을 판매해 온 그는 1년 중 딱 네 번만 바쁘다. 밸런타인데이(2월 14일)와 화이트데이(3월 14일), 그리고 빼빼로데이(11월 11일)와 대학수학능력시험이 겹치는 11월과 12월 크리스마스 시즌이 그때다. 특히 밸런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 전후의 매출액은 1년 매상의 80%에 이른다. 지 씨는 “일감이 몰리는 10월 말부터 이듬해 3월까지는 아르바이트생을 써야 할 정도로 바쁘지만 여름에는 거의 초콜릿 주문이 없다”며 “계절을 탈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특정일의 매출비중이 이렇게까지 높을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밸런타인데이가 되면 젊은 여성들은 정성스럽게 포장한 선물과 초콜릿을 남자친구에게 건넨다. 남자친구는 꼭 한 달 뒤인 화이트데이에 조금 더 비싼 선물과 사탕으로 여자친구에게 보답한다. 혹여 서운하실까 예비 장모님께 드릴 선물도 잊지 않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이런 ‘데이(Day)’에 열광하는 걸까.

각종 ‘데이’의 탄생 비화

성 밸런타인데이 유래와 관련해서는 로마의 성 발렌티누스 주교가 순교한 2월 14일을 기념해 생겼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는 클라우디우스 2세 집권기인 269년 황명을 어기고 병사들의 혼인성사(婚姻聖事)를 집전했다가 순교했다. 이 외에도 15세기 영국의 연인 한 쌍으로부터 비롯됐다거나, 새들이 교미를 시작하는 날이라는 설도 있다. 어쨌든 오래전부터 서양에선 성 밸런타인데이가 ‘연인이 서로 사랑을 확인하는 날’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에게 친숙한 ‘여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주고 사랑을 고백하는 날’은 20세기에 들어 일본에서 생겼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1960년대 일본의 한 제과업체가 여성들을 대상으로 초콜릿을 통한 사랑고백 캠페인을 벌인 것이 계기였다고 한다. 이 마케팅의 영향은 한국과 중국 등 주변국에도 퍼져 나가게 됐다. 화이트데이 역시 비슷한 시기 마시멜로나 비스킷 판매량을 늘리기 위해 고심하던 일본 제과업체의 마케팅이 낳은 결과로 알려져 있다.

이 두 ‘데이’가 일본에서 건너온 ‘수입품’이라면 빼빼로데이는 한국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토산품’이다. 1990년대 중반 부산의 한 여자중학교에서는 매년 11월 11일 친구들끼리 ‘1’자 모양의 ‘빼빼로’ 과자를 선물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지역신문 기사에서 이런 사실을 접한 롯데제과가 기획상품을 시판하고 마케팅에 활용하면서 빼빼로데이는 전국적으로 인기를 얻었다. 이 회사 홍보팀의 안성근 과장은 “처음 기사가 났을 때는 일부 학생이 재미삼아 하는 것이려니 하고 회사에서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듬해에도 같은 정보가 올라왔고, 그것을 마케팅에 활용한 결과 큰 성공을 거두게 됐다”고 설명했다. 빼빼로데이는 지난해 미국의 한 초등학교용 참고서에 소개되기도 했다. 케이팝(K-pop·한국대중가요)에 열광하는 해외 팬들도 이날이면 한국 가수들에게 빼빼로를 선물한다.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밸런타인데이 등은 기존의 물건이나 의미들을 한데 버무려 재창조하는 일본식 문화의 대표적 사례”라며 “한국은 끼리끼리 문화가 강해 유통업계의 데이 마케팅이 젊은층을 중심으로 쉽게 확산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썩 내키진 않지만 “챙길 건 챙긴다”

‘O₂’는 이번 기회에 20대 이상 성인남녀 400명에게 ‘데이 마케팅’에 대한 생각을 들어봤다. SK마케팅앤컴퍼니의 ‘틸리언패널’이 참여한 이번 설문은 인터넷을 통해 이뤄졌다.

먼저 응답자들이 배우자(또는 애인)의 생일만큼이나 밸런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상대방의 생일에 “선물(또는 편지)을 항상 준다” 또는 “가끔 준다”는 응답은 91.8%, 각종 ‘데이’에 선물을 준다는 응답은 87.3%로 엇비슷했다. 매년 생일에 상대방에게 선물을 하는 사람 중 밸런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를 전혀 챙기지 않는다는 응답자는 3.9%밖에 되지 않았다. 이런 날들이 생일만큼이나 중요한 기념일로 자리를 잡았다는 얘기다.

흥미로운 것은 상대방의 생일에 거의 선물을 챙겨 본 적이 없다는 응답자 중 이런 ‘데이’에 가끔 선물을 한다는 답변 비율이 무려 30.3%나 됐다는 점이다. (이는 기사 뒷부분에 나오는 체면문화나 집단주의의 영향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각종 ‘데이’ 때 기쁜 마음으로 선물을 하는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노’다. 전체 응답자 중 44.0%는 “기업들의 상술에 놀아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고 답했다. 아예 선물을 챙기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부정적 반응(63.6%)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각종 ‘데이’마다 항상 선물을 준다고 했던 응답자들조차 데이 마케팅에 같은 반응(36.2%)을 보인 것은 의외였다. 특히 이들 중에는 전체 평균(20%)보다 높은 24.2%가 “기념일들이 있어 좋지만 재정적으로 부담이 된다”는 답변을 골랐다.

종합해보면 대략 이렇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은 각종 ‘데이’를 그냥 넘기는 법이 없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상대방에게 선물을 줘서 기쁜 마음보다 마케팅에 이용당했다는 생각과 금전적 부담으로 인한 불편함이 더 크다.

김나경 LG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한국 특유의 ‘체면문화’를 이유로 꼽았다.

“유치원에 아이를 데리러 가는 학부모들도 명품 백을 하나씩 메고 있어요. 많은 사람이 스스로를 명품족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명품 백이나, 최소한 명품 지갑이라도 하나 사려고 하지요. 그 집단에서 탈락하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데이 마케팅의 성공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들이 다 주고받는데 나만 초콜릿을 주거나 받지 못하면 불편해지는 것이지요.”

집단주의 성향도 데이 마케팅의 성공 배경 중 하나다. 김진한 경희대 테크노경영대학원 교수는 “우리나라 소비자들은 개인의 개성보다는 집단의 방향성에 따르기를 선호한다”고 말했다. 네덜란드의 비교문화커뮤니케이션 전문가인 마리케 드 무이 박사는 ‘소비자 행동과 문화’(2007년, 나남)에서 “집단주의 문화권에서는 ‘우리’라는 개념에 민감하다. 이곳에서는 배타적 소집단 구성원과의 융화와 체면 유지가 중요하다. 대부분의 서구사회는 개인주의적이며 아시아와 남미 국가는 집단주의적이다”라고 밝혔다. 그가 인용한 헤이르트 호프스테더의 ‘2001년 국가별 지수’를 보면 한국의 개인주의 지수는 18로 64개국 중 54번째였다. 개인주의 성향이 가장 강한 나라는 미국(91)과 호주(90)였고, 일본도 46으로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개인주의가 강했다.

지나치면 아니함만 못하다

여준상 동국대 교수(경영학)는 성공적 데이 마케팅의 기준으로 리추얼(일종의 예식행위)의 유무를 들었다. 그는 “밸런타인데이 초콜릿을 어버이날의 카네이션과 같은 상징물로 볼 수도 있다”며 “사람들이 초콜릿 선물이란 리추얼을 통해 사랑이란 감정을 공유하면 대인관계나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 개선에도 긍정적 효과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전인수 홍익대 교수(경영학)도 “마케팅에 시간의 개념을 도입한 시즈널마케팅이나 타임마케팅 등은 새로운 소비를 창출하는 매우 유효적절한 수단 중 하나”라는 긍정적 평가를 내렸다. 그는 “평소 초콜릿을 먹지 않던 나도 밸런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에 아이들이 가져온 초콜릿이나 케이크를 먹는다”며 “‘낫 유저(not user)’가 ‘유저’가 됨으로써 새로운 시장이 창출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두 전문가 모두 지나친 상술은 오히려 소비자의 반발심을 살 수 있다고 경고한다.

여 교수는 “최근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난 대부분의 ‘데이’들은 단순한 주목 끌기 방편이거나 특정 상품의 반짝 매출을 겨냥한 것”이라며 “소비자 시각에서는 ‘얄팍한 상술’ 이상의 평가를 내리기가 힘들다”고 지적했다. 전 교수도 “블랙데이나 삼겹살데이, 와인데이 등 너무 많은 ‘데이’들이 양산돼 사회 전체가 이미 피곤해하고 있다. 이는 결코 작지 않은 사회적 비용을 초래한다”고 강조했다.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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