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김상미, 김영애, 조명, 천수호, 김산옥 여류시인 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나한테 이래도 되는 거야? 내가 당신보다 나이도 많잖아. 어떻게 나를 ‘개무시’할 수 있어? 시 오래 쓴 게 유세야? 시 10년 이상 쓴 애들은 그만 써도 된다고 생각해.”
문단의 하극상이다. 등단한 지 4년밖에 안 된 김영애 시인(57)이 20년이 넘은 김상미 시인(55)을 몰아세운다.
김산옥 시인(41)은 어떤가. “요번에 상 받은 그 시인 있잖아요. 시는 개떡 같은데 색마 같은 지 지도교수에게 잘 보여서 교수 해먹는….” 여류 시인들의 살벌한 뒷담화가 이어지고, ‘그년(그 시인)은 미친년’으로 규정된다.
아! 청초한 시를 쓰던 여류 시인들의 입은 거침이 없다. 쉬쉬하던 시단의 구린 구석을 시원하게 배설한다.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어디까지나 연극이니까.
김상미 김영애 김산옥 조명(57) 천수호(47) 등 여류 시인 5명이 기성 배우들과 함께 정통 연극 무대에 선다. 제목은 ‘누가 연극을 두려워하랴’. 16∼20일 서울 대학로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에서 막을 여는 프로젝트 집단 ‘두목’의 첫 번째 작품이다. 시인이자 극작가인 최치언 씨가 작품을 쓰고 연출을 맡았다.
사연은 이렇다. 평소 친하던 김상미 시인과 최 작가가 ‘시인을 무대에 세워보자’는 데 의기투합했고, 김 시인이 연극에 도전하고 싶은 지인들을 모았다. 소식을 들은 신달자 유안진 최문자 최금녀 전서은 이화은 시인이 후원에 참여했다.
매서운 칼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했던 5일 저녁. 서울 대학로의 지하 연습실을 찾았다. 지난해 9월부터 시작한 연습은 요즘엔 매일 오후 6시부터 11시까지 이어지고 있다. 만만치 않은 강행군인데도 배우들의 얼굴은 밝았다.
“여태껏 몸을 반도 안 쓰고 산 것 같아요. 욕 한 번 안하고 살았는데 ×새끼, ○새끼 다 한다니까요.”(김상미) “연극하면서 온통 ‘깨졌지만’ 되레 자신감이 붙더군요. 연출 선생님은 무섭지만 정말 미다스의 손이에요. 감탄의 연속이죠.”(조명)
연습을 지켜봤다. 연극인지 실제인지 헷갈렸다. 내용 자체가 연극을 준비하는 시인들의 얘기였기 때문이다. ‘신인’ 배우들의 대사는 서툴고, 자신감은 좀처럼 살아나지 않았다. 시인들과 기성 배우들은 다퉜다. 시인들은 “너희가 시를 아느냐”고 쏘아대고, 배우들은 “너희가 연극을 아느냐”고 받아쳤다.
연출가는 ‘시인’이라고 접어주지 않았다. “불안하고 눈동자 흔들리고 하면 다 보여요. 악으로 깡으로 하세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자신 있게요.” 중년의 시인들은 벌 받는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1시간 반을 잠시도 쉬지 않고 연습한 시인들은 커피믹스와 ‘오예스’를 달게 먹으며 토막 휴식을 가졌다. “학예회 수준이면 안 된다는 의지가 강해요. (시인)배우들도 단단히 각오하고 있어요.”(천수호)
사서 한 고생에서 시인들은 무엇을 느꼈을까. “‘연극이 시고, 시가 연극이고, 그게 인생이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시도, 연극도 결국 자신을 드러내는 하나의 작업이죠.”(김영애) “1990년대까지만 해도 시극(詩劇)이 많았는데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어요. 시극을 되살리는 데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김상미)
“개막이 코앞”이라며 불안감을 건드리자 시인들은 “가슴이 철렁한다” “카운트다운하는 것 같다” “연습만 계속하면 좋겠다”며 까르르 웃었다. 시인들은 개막 전까지 자신감을 충전할 수 있을까. ‘누가 연극을 두려워하랴’는 제목처럼. 전석 2만 원. 070-8759-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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