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읽을까 겁나는 다문화 ‘인식 개선’ 동화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1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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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둥이… 에이즈 환자 바글… 거지 떼처럼… 미개한 아프리카인…

‘아이들은 거지 떼처럼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 몇몇 아이는 피가 배어 나오는 염소 고기를 뜯어 먹느라 바빴다. 맙소사!… 나는 토악질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한국건강가정진흥원이 지난해 2월 ‘다문화 인식 개선을 위한 콘텐츠 공모전’ 수상작으로 선정한 동화의 주인공인 다문화가정 소년 박킬리가 어머니의 나라 케냐에 도착한 뒤 접한 풍경을 묘사한 대목이다.

한국건강가정진흥원은 이 동화 1만3000부를 12월 삼성사회봉사단의 후원금으로 발간했다. 동화책은 다문화가정이 많은 지역 초등학교와 지역아동센터, 다문화가족지원센터, 공공도서관 등 전국 5000여 곳에 깔렸다. 한국건강가정진흥원은 여성가족부로부터 다문화 관련 사업을 위탁받아 운영하는 기관이다.

동화 속 주인공은 케냐인 외할아버지와 대화하면서 깨달음을 얻는다. 일반 사자와 다른 색으로 태어난 하얀 사자가 역경을 극복하려 하지 않고 신세타령만 했다면 초원의 왕이 될 수 없었다는 것. “사자는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교훈이다.

“케냐인은 가치 없고 형편없는 사람들이 아니다. 단지 살아가는 방법이 다를 뿐이다”라는 케냐인 엄마의 말에는 다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라는 교훈이 들어 있다. 동화는 주인공이 케냐인의 피를 가졌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어려움을 극복하겠다고 다짐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책 곳곳에 담긴 아프리카 비하 내용이 ‘참된 교훈’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동화의 도입부는 킬리가 한국에서 놀림을 받으면서 신세를 한탄하는 장면이다. “아프리카에는 에이즈 환자가 바글거린다.” “깜둥이랑 결혼한 멍청한 인간들이 문제.” “식인종 출신 깜씨.”

주인공이 케냐에 도착한 뒤 편견은 심해진다. “고물상에서 주워 와도 그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케냐에 대한 첫인상은 평균 이하였다.”
▼ 동화 저자 “표현 순화 애썼지만 미처 다 못살펴” ▼

잘못된 고정관념도 많이 보인다. “(케냐에서 살려면) 생수가 아닌 물도 벌컥벌컥 마실 줄 알아야 한다.” “피가 흐르는 육식을 즐겨야 한다.” 태국에 대해서도 “코끼리 똥이 널린 후진국”이라고 말한다.

‘개뿔’ ‘개망신’ ‘재수 없는 깜둥이 ××’ 등과 같은 비속어도 쓰였다. 미국에서 깜둥이(negro)라는 말을 사용하는 교육기관은 없다. “케냐는 미국 대통령 오바마의 고향”이라는 등 사실과 다른 내용도 담겼다.

시상식이 끝나고 책을 발간하기까지는 약 10개월의 시간이 있었다. 이 기간에 한국건강가정진흥원과 여성부는 비속어나 아프리카 비하 표현을 다듬지 않았다.

이희수 한양대 글로벌다문화연구원 사회통합연구단장은 “나쁜 얘기를 들은 후엔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그 인식이 바뀌기 어렵다”며 “아이들의 인식이 성숙하기도 전에 아프리카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구체화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아프리카인도 우리와 똑같은 아름다움과 생각을 지닌 인간임을 심어주는 게 자연스러운 다문화 교육”이라고 덧붙였다.

동화의 저자는 “케냐를 비하할 의도도 없었고, 비하해서도 안 된다”며 “비하적인 표현을 순화하려고 애썼지만 미처 다 살피지는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출간 과정에서 주최 측이 오탈자만 바로잡고 책을 내 버린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 작품 때문에 피해를 보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여성부 관계자는 “담당자가 바뀌어 경위를 파악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출간 과정에서 전문가 검토를 거쳤어야 하지 않느냐는 지적에 “수상작에 대해서는 다문화가족 모니터단이 검토를 했다”고 말했다.

이샘물 기자 ev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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