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커버스토리]톰 크루즈가 멋진들 ‘탑건’ 내 남편만 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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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2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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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기 사고 비보에 가슴 덜컥… 공군 조종사 아내들은 무엇으로 사는가

꿈자리라도 뒤숭숭할 때면 남편이 비행하는 내내 아내의 애간장이 타들어간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태어나도 조종사의 아내가 되고 싶다고 한다. F-15K 전투기 조종사인 신건우 소령과 그의 아내 성하영 씨가 딸 수아 양(3), 아들 명찬 군(4)과 함께 대구의 비행단 내 관사에서 포즈를 취했다. 대구=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꿈자리라도 뒤숭숭할 때면 남편이 비행하는 내내 아내의 애간장이 타들어간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태어나도 조종사의 아내가 되고 싶다고 한다. F-15K 전투기 조종사인 신건우 소령과 그의 아내 성하영 씨가 딸 수아 양(3), 아들 명찬 군(4)과 함께 대구의 비행단 내 관사에서 포즈를 취했다. 대구=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 얼마 전 가슴 아픈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5일 오후 경북 예천에서 T-59 고등훈련기가 추락해 박정수 중령(34·공사 48기)과 권성호 중령(33·공사 49기)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박 소령은 둘째 딸이 태어난 지 20일 만에 사고를 당해 안타까움을 더했습니다. 권 소령의 아내는 공사 동기생으로 국내 첫 여성 전투기 조종사인 박지원 소령(33). 세 살배기 아들만 남겨 두고 먼저 떠난 남편을 추모하며 하염없이 눈물 흘리는 그녀를 보고 온 국민이 함께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혹자는 “한쪽 다리는 세상에, 다른 한쪽은 관에 딛고 사는 게 전투기 조종사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최근 전역한 한 전투기 조종사는 “죽을 고비를 세 차례는 넘겨야 진정한 조종사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멋지게 비행하는 모습만 상상하는 일반인의 생각과 달리 조종사들의 삶은 항상 사선(死線)을 넘나드는 긴장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조종사 못지않게 스트레스와 긴장으로 하루를 보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조종사의 아내입니다. 동아일보 주말섹션 ‘O2’가 아내의 눈을 통해 본 조종사의 삶, 그리고 조종사의 아내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
지난해 11월 말. 민간인이 거주하는 연평도를 향해 북한군이 해안포 수십 발을 쐈다. 그 소식을 들은 남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평소 그렇게 온화하고 침착하던 남편이었지만 이날만큼은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분노했다.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부대에서 연락이 왔다. 유사시 북한의 해안포 기지 타격을 위해 무기를 탑재하고 연평도 상공으로 출격하라는 명령. 현관문을 나서면서 남편은 “훈련이 아닌 실전”이라고 했다. 또 “북한이 도발하면 지체하지 않고 미사일을 쏘겠다”며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 수도 없이 비행 나가는 남편을 배웅했지만, 그가 실제 상황이 발생하면 가장 먼저 전장에 투입되는 군인이란 사실을 이때 처음 몸으로 느꼈다. ‘혹시 진짜로 미사일을 쏘게 된다면?’ 군인 신분은 백번 이해됐지만 그래도 남편이 무사히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단 생각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나가는 남편의 손을 잡고 한동안 놓아주질 못했다. 내 표정을 읽었을까. 남편은 힘든 미소를 지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걱정하지 말아요. 돌아올 때까지 아이들 잘 부탁해요.”

○ “아빠도 저럴 수 있어?”

지난해 연평도 사건 당시 성하영 씨(32)의 기억이다. 하영 씨는 역대 최고 점수로 올해 공군 ‘탑건’(최우수 조종사)에 선정된 신건우 소령(37·공사 45기)의 아내. 그녀는 당시 남편이 비행하는 동안 다른 일을 하지 못했다. 다른 조종사 아내들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고, 또 뉴스를 보면서 노심초사했다. 다행히 북한의 추가 도발이 없어 교전은 없었지만 남편의 비상출격은 해를 넘길 때까지 계속됐다. “보통 아침에 챙겨주는 반찬 수가 5가지였다면 이때만큼은 10가지가 넘었어요.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남편을 위한 기도와 그 사람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는 일밖에 없었거든요.”

하영 씨는 스물두 살이던 2001년 친구 소개로 다섯 살 연상인 남편을 처음 만났다. 남편의 첫인상은 과묵함 그 자체. 게다가 3시간이 넘도록 자신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군인이란 직업 특성상 과묵함은 어느 정도 예상했던 터. 몇 번 더 만남을 이어가니 속 깊은 배려가 눈에 띄었다. 특히 조종복을 입은 모습에 반했다. “한번은 공군 송년 행사에서 조종복을 입고 그이가 나타났는데 영화 ‘탑건’에 등장하는 주인공보다 훨씬 더 멋있었어요. 저 사람이 내 남자가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리고 3년 뒤 결혼에 골인했다. 하지만 곁에서 본 조종사란 직업은 이전에 가졌던 환상과 차이가 컸다. 빈번한 야간비행에 사나흘에 한 번꼴로 찾아오는 24시간 비상대기, 주말에도 마음대로 부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생활. 가장 큰 고민은 안전에 대한 걱정이었다. 다른 직장인 남편처럼 아침에 웃으며 출근했다가도 영영 돌아오지 못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컸다. ‘그래도 내 남편은 아니겠지.’ 하영 씨는 이런 마음으로 무서운 생각을 애써 머리에서 지웠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고통이 찾아왔다. 2006년 6월 남편 전투기와 같은 기종인 F-15K 한 대가 야간비행훈련 도중 추락해 조종사 2명이 사망했다. 순직한 조종사 가운데 한 명은 하영 씨가 잘 알고 지내던 이의 남편. 그 부부에 대한 안타까움과 내 남편에 대한 걱정이 동시에 그녀를 휘감았다. 일주일 동안 하염없이 울었다.
▼ “비행장 굉음은 달콤한 멜로디… 소음 논란 속상해요” ▼

신건우 소령이 F-15K 동체 위에서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고 있다. 신 소령은 지난 1년간 비행훈련과 비행경력, 작전 참가 등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인 조종사인 ‘탑건’에 선정됐다.
신건우 소령이 F-15K 동체 위에서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고 있다. 신 소령은 지난 1년간 비행훈련과 비행경력, 작전 참가 등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인 조종사인 ‘탑건’에 선정됐다.
그런데 이런 고통은 비단 하영 씨뿐만 아니라 조종사의 아내라면 누구나 겪는 아픔이다. 특히 결혼 뒤 1, 2년 안에 심각한 고민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KF-16 전투기를 모는 베테랑 조종사 김철교 소령(35·공사 46기)의 아내 권수영 씨(36)도 마찬가지였다. 결혼 초기 남편 걱정으로 밤을 자주 지새웠다. 특히 2006년 어린이날은 어느 때보다 힘들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이날 수영 씨는 남편과 함께 두 아이를 데리고 공군 특수비행팀 블랙이글의 비행을 보러 갔다. 그런데 눈앞에서 곡예비행을 하던 전투기 한 대가 떨어졌다. 얼굴이 흙빛이 된 남편은 다섯 살 큰아이가 “아빠도 저럴 수 있어?”라고 묻는 말에 아무 말도 해주지 못했다. 수영 씨는 이날 처음으로 남편이 조종사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 “행여나…” 평일엔 부부싸움도 안해

전투기 조종사 아내들에겐 특별한 습관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하영 씨는 결혼한 뒤로 아침에 깬 후 하늘부터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다. 날씨가 안 좋으면 비행이 힘들다는 걸 알아 걱정이 앞선다. 남편이 비행을 나간 뒤에도 기상이 갑자기 나빠지면 수시로 부대에 전화한다. 부대에선 가족들의 이런 걱정을 잘 알기에 상황을 최대한 상세하게 알리며 배려해 준다. 하영 씨는 남편이 비행하는 시간엔 설거지도 잘 하지 않는다. 혹시 그릇이라도 깨뜨리면 하루 종일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어서다.

다른 사람들에겐 귀가 따가운 비행장 소음. 하지만 조종사 아내들에겐 달콤함 멜로디로 들릴 때가 많다. 보통 항공 사고가 나면 모든 기종의 비행이 중단돼 비행장이 쥐 죽은 듯 조용해진다. 조종사 가족들에겐 그때만큼 불안할 때가 없다. 수영 씨는 “우렁찬 전투기 엔진 소리가 들려야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했다.

물론 소음과 관련해선 인근 주민들의 불만이 많다. 그러나 주민들이나 아이들의 학교 친구들이 무심코 내뱉는 말 한마디가 조종사 가족들에게는 큰 상처가 되기도 한다. 한 현역 조종사의 아내는 최근 겪었던 일이라며 이런 얘기를 전했다.

“우연히 부대 근처에서 주민들이 하는 말을 들었어요. 전투기 소음 때문에 시끄러워 죽겠다고, 사고라도 나서 좀 조용해졌으면 좋겠다고. 그 사람은 농담으로 내뱉었을지 몰라도 전 눈물이 났습니다. 그날 남편을 붙잡고 한참을 울었어요.”

조종사 부부에게선 부부 싸움도 평일엔 찾아보기 힘들다. 수영 씨 역시 남편에게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일단 “오늘 비행 있느냐”고 물어보기부터다. 있다고 하면 혹시 비행에 방해가 될까 봐 꾹 참는다. 그나마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시점이 쉬는 토요일. 하지만 일요일만 돼도 다음 날 비행이 걱정돼 또다시 인내의 시간을 가진다. 조종사 부부는 보통 항공기 사고 얘기 역시 입 밖에 잘 꺼내지 않는다. 일종의 ‘금기어’로 생각해 그러는 경우가 많다.

그런 애틋한 가족의 마음을 잘 알기 때문일까. 대부분의 조종사가 든든한 남편이자 자상한 아빠라는 게 아내들의 공통된 얘기다. 하영 씨는 “남편은 야간 비행을 마치고 들어와도 없는 시간을 쪼개 아이들과 정말 열심히 놀아 준다. 그러다 보니 항상 나는 악역, 남편은 완벽한 아버지가 된다”며 웃었다.

한 현역 공군조종사 부부는 가족사진을 많이 찍는다고 했다. 그 조종사의 아내는 “사고는 절대 생각하기 싫지만 그래도 추억할 거리를 찾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토로했다. 지난해 3월 강릉에서 전투기 훈련 도중 순직한 오충현 대령(당시 43세·공사 38기) 부부의 경우 1992년부터 몇 년 동안 부부가 번갈아 가며 일기장을 채웠다. 오 대령의 부인 박소영 씨(44)는 “이 일기장을 다시 펼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남편이 가족, 동료 등에게 남긴 글이 있는 이 일기장이 남편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된다”며 착잡한 심정을 밝혔다.

○ 나는 조종사의 아내다

KF-16 전투기를 모는 김철교 소령(왼쪽)은 공군에서도 알아주는 에이스. 아내인 권수영 씨는 그런 남편이 세상에서 가장 듬직하고 멋있다고 얘기한다. 공군 제공
KF-16 전투기를 모는 김철교 소령(왼쪽)은 공군에서도 알아주는 에이스. 아내인 권수영 씨는 그런 남편이 세상에서 가장 듬직하고 멋있다고 얘기한다. 공군 제공
2007년의 어느 날. 하영 씨는 야간 비행을 하고 돌아온 남편이 눈에 띄게 피곤해 보여 물었다. 무슨 일 있었느냐고. 평소 일 얘기를 잘 하지 않던 남편이었지만 이날만큼은 “오늘이 다시 태어난 날”이라면서 말을 꺼냈다. 훈련 도중 1m가량 간발의 차이로 다른 비행기와 스쳤다는 설명, 그래서 액땜을 했다는 심정으로 동료와 술 한잔하고 왔다는 얘기였다.

조종사의 경우 항상 긴장을 안고 살기에 공군에서 엄격하게 관리한다. 비행하기 12시간 전부턴 술도 마실 수 없고, 군의관으로부터 매일 건강검진도 받아야 한다. 감기약도 군의관의 처방 없인 복용할 수 없다. 또 비행안전교육, 사고예방교육은 물론이고 심리치료 등도 꾸준히 받아야 한다.

조종사 아내들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 남편이 비행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그러면 조금이나마 남편 일을 이해하게 된다. 때로는 남편이 보는 앞에서 모의 비행훈련장치인 전투기 시뮬레이터 탑승도 한다. 거기서 조종을 해보면 남편의 일이 몸으로 느껴진다. 하영 씨 역시 “남편이 할 땐 그냥 일상처럼 느꼈는데 직접 해보니 정말 아무나 못하는 힘든 일이란 걸 실감했다”며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아무리 남편의 일을 이해하려 노력해도 가끔씩 느껴지는 불안한 기분은 어쩔 수가 없다. 특히 조종사의 아내들은 꿈에 민감한 경우가 많다. 꿈자리가 뒤숭숭하면 하루 종일 신경이 쓰인다. 하영 씨는 웬만하면 꿈 얘기를 하지 않는다. 괜히 남편이 알게 되면 더 일에 집중하지 못할 것 같아서다. 또 남편 성격상 그런 얘기를 하면 “내가 안 해도 누군가가 어차피 비행을 해야 한다”며 듣지 않을 게 뻔해서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번은 정말 기분 나쁜 꿈을 꿨다. 남편의 전투기가 이륙하려 하는데 사람들이 옆에 서서 흰 손수건을 흔드는 게 아닌가. 게다가 이날은 아침부터 안개가 뿌옇게 끼어 있었다. 고민 끝에 하영 씨는 남편에게 얘기하기로 결심했다. 남편이 말을 듣지 않으면 부대에 있는 ‘사랑의 전화’(조종사의 아내가 악몽을 꾼 경우 아내가 직접 비행 취소를 요청할 수 있는 전화)를 이용할 생각까지 했다. 다행히 이날 기상이 계속 좋지 않아 비행은 취소됐다. 하영 씨는 이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기분이 섬뜩하다.

항상 불길에 뛰어드는 소방관을 보듯 불안한 마음을 가눌 순 없지만 그래도 조종사의 아내들 대부분은 남편을 누구보다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O2’가 현역 공군 조종사의 아내 10명에게 ‘다시 태어나도 조종사의 아내로 살고 싶은가’란 질문을 했더니 6명이 ‘매우 그렇다’, 3명이 ‘그렇다’고 답했다. 수영 씨 역시 그랬다. 그녀는 “조종사란 직업은 생계를 위한 수단이 아니다”라고 했다. 사명감과 희생정신, 그리고 우리나라의 영공을 수호한다는 자긍심 없이는 도저히 할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사실 남편을 바라보는 세간의 인식에 대해선 아쉬움도 있다. 사고가 나면 “조종사 잘못으로 사고가 났다”거나 “조종사가 미련해서 빨리 탈출하지 않고 조종간을 지키다 목숨까지 잃었다”는 등의 비난이 나오는데 이런 말이 아내들 가슴에 생채기를 낸다. 영웅 대접까진 아니더라도 최소한 감사하는 마음은 가졌으면 좋겠다는 게 이들의 솔직한 심정이다. 하영 씨는 “한국 조종사들은 전투기를 살리기 위해 조종간을 지키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단순히 책임을 면하기 위해서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본능적으로 분신과도 같은 전투기를 살리기 위해, 혹시 떨어진 동체가 민간인 지역을 덮을 수도 있기에 이를 막으러 끝까지 조종간을 놓지 못하는 거예요. 저희 남편이요? 일전에 당신도 그럴 거냐고 물어보니 대답을 않고 미소만 짓더군요.”

대구=신진우 기자 nicesh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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