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때 해군이 조직한 반공 치안대가 미8군 한국인 유격대의 모체”

  • 동아일보
  • 입력 2026년 6월 23일 15시 43분


6·25전쟁 당시 북한군 후방에서 유격전을 벌였던 미군 제8240부대. 이 부대는 한국인으로 구성됐다. 국가보훈부 제공
6·25전쟁 당시 북한군 후방에서 유격전을 벌였던 미군 제8240부대. 이 부대는 한국인으로 구성됐다. 국가보훈부 제공
6·25전쟁 당시 북한군 점령 지역에서 활동하며 약 6만9000명의 적 병력을 살상하고 주요 시설을 파괴한 한국인 유격대의 창설과 운영에 한국 해군의 기여가 컸다는 분석이 나왔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전쟁 발발 제76주년을 맞아 학술 세미나 ‘6·25전쟁기 무명의 영웅들’를 17일 개최했다. 이동욱 연구원은 세미나에서 “한국 해군이 치안대를 무장세력으로 발전시켰을 뿐 아니라, 미 제8군의 유격전도 현장에서 공동 지휘하며 유격전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밝혔다.

이 연구원은 발표문 ‘6·25전쟁기 미 제8군 한국인 유격대의 창설 배경’에서 특히 미군 제8240부대에 주목했다. 한국인으로 구성된 이 부대는 흔히 ‘켈로 부대’로 불리는 ‘KLO(Korea Liaison Office) 첩보부대’와 수복지역 내 여러 반공 치안대를 흡수해 1951년 7월 창설됐다.

이 연구원에 따르면 치안대의 무장화부터 우리 해군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에 밀리면서 1950년 12월 서부전선의 육로가 차단되자, 피난민과 치안대원들은 황해도 해안으로 집결했다. 해군은 1951년 1월 피난민을 구출하면서 치안대에 소총탄 2만 발을 제공했고, 서해 도서에 산재한 치안대원 중 3000명을 선발한 뒤 4개 대대로 편성해 유격 전술을 훈련했다.

이들은 2월 2일부로 해군의용대로 개편됐고, 대원 150명이 상륙해 옹진군 흥미면 일대를 확보하고 적 여단장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 연구원은 “해군의용대는 여러 차례 상륙작전을 통해 전투 능력을 갖춘 무장세력으로 발전했음을 입증해, 미 제8군의 한국인 유격대 창설의 토대를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이날 세미나 토론자로 나선 김인승 공군사관학교 교수는 “당시 서해를 관할하던 영연방 해군은 피난민 구호에 큰 관심이 없었고, 혹한으로 구조 여건도 매우 열악했다”며 “한국 해군 함정의 적극적인 구출 작전으로 대다수 반공주의 무장 조직이 최소한의 피해로 인적 기반을 보존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중공군의 대공세로 후방 작전의 필요성이 부각되자, 미군은 1951년 2월 백령도에 유격군 사령부인 윌리엄 에이블 기지(William Able Base)를 설치했다. 한국 해군이 훈련한 치안대원을 유격대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이 연구원에 따르면 기지는 미군과 해군 백령도 주둔부대가 연합해 운영했고, 최초의 유격대인 동키 제1부대 역시 우리 해군의 주선으로 창설됐다.

서해 도서에 산재한 치안대는 속속 미 제8군의 한국인 유격대로 재편됐고, 약 한 달 만에 1만2000명 규모로 성장했다. 유격대는 군번도, 계급도 없이 북한 후방에서 포로 획득, 보급로 파괴 등 4000여 회의 작전을 수행했다. 정전협정 체결 뒤 국방부 제8250부대로 재편돼 육군에 편입됐다.

이 연구원은 “기존 인식은 주로 미국 사료 등에만 의존한 탓에 이 부대가 치안대를 모체로 미군의 계획에 따라 조직되고 운영됐다는 데 그쳤다”며 “하지만 유격대의 형성은 한국 해군의 지원 아래 무장 세력으로 발전한 북한 내 반공주의자들이 한·미 군 당국과 협력한 결과”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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