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Life]‘국내 화장품 원조’ 윤독정 여사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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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1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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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동백기름 상품화, 팔도 미인들 구름떼로 몰려

1938년경의 윤독정 여사. 당시의 보통 여인네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차림새지만 두 발을 벌리고 디딤돌에 걸터앉은
자세나 이가 드러나도록 웃는 얼굴은 무척 여유롭고 당당하다. 아모레퍼시픽 제공
1938년경의 윤독정 여사. 당시의 보통 여인네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차림새지만 두 발을 벌리고 디딤돌에 걸터앉은 자세나 이가 드러나도록 웃는 얼굴은 무척 여유롭고 당당하다. 아모레퍼시픽 제공
1930년대 황해도 개성 남문거리의 끝자락. 이렇다 할 간판도 없는 가게에 ‘아름다움’을 사려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개성 사람은 물론이고 전국을 떠도는 보부상들에게도 명성이 자자했다. 개성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이 가게는 개성에서 필히 들러야 할 곳으로 여겨졌다. 윤독정(아모레퍼시픽 창업자 서성환 회장의 어머니·1891∼1959)의 동백기름은 그런 마력이 있었다.

남문거리에서 만든 동백기름

윤독정의 고향은 개성 인근의 평산군 세곡면 생금리. 훗날 친척들은 그를 ‘생금할머니’라 불렀다. 한량 기질이 있던 남편 서대근(1890∼1973)에게만 의지할 수 없었던 윤독정은 돈벌이를 찾아 서울행을 결심했다. 1928년 아이 넷(부부는 후에 자녀 둘을 더 낳아 3남 3녀를 키움)을 이끌고서였다. 그러나 서울은 시골 아낙이 부딪치기에 녹록한 상대가 아니었다. 서울생활을 포기하고 2년 만에 다시 돌아온 곳이 고향 인근의 남문거리였다.

처음엔 도매상에서 몇몇 잡화를 떼어와 파는 게 전부였다. 머릿기름도 그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 머릿기름이란 게 참 묘했다. 먹고살기조차 어려운 시절인데도 그 시절 여성들에게는 필수품이나 마찬가지였다. 하기야 그땐 하얀 가르마와 윤기 흐르는 까만 머리가 미(美)의 기준이었으니까.

시장에서 신참티를 벗어가던 윤독정은 아예 머릿기름을 직접 만들기로 했다. 그중 동백에 특히 주목했다. 동백기름은 아주까리기름(피마자유)이나 수유기름보다 값이 비쌌지만 냄새가 없고 잘 마르지 않아 선호도가 높았다. 동백기름에 대한 여인들의 동경심은 당시 신문기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맹물에다 소량의 동백유(冬栢油)를 타가지고 순전한 동백기름이라고 하며 어수룩한 가정부녀를 속여먹던 이인조의 범인이 잇다.’(동아일보 1938년 7월 5일자 2면, ‘물탄 동백유 가정부인사기’ 중) 개성은 또 상인들의 고향 같은 곳 아닌가. 수요는 충분해 보였다. 남쪽에서만 나는 동백 열매 구하기가 난제였지만 자주 거래하던 보부상들이 이 문제를 해결해줬다.

윤독정의 동백기름은 1932년 첫선을 보였다. 훗날 태평양(현 아모레퍼시픽)을 창업한 넷째 서성환(1924∼2003)이 만 여덟 살이던 해였다. 식구들을 굶기지 않으려 만든 동백기름이 한국 최대 화장품 회사의 모태가 될 거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시골 아낙의 가내수공업

윤독정은 1938년쯤이 돼서야 가게 간판을 달았다. 가게에는 ‘창성상점’, 제품에는 ‘창성당 제품’이란 이름을 붙였다. 당시에는 최고급 제품을 흔히 ‘당급(堂級) 화장품’이라 불렀다. 윤독정은 제품에 ‘당’자를 씀으로써 품질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낸 것이다.

윤독정 여사가 1930년대에 쓰던 기름 짜는 틀을 근래에 재현한 것.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의 서광다원(차나무 재배단지) 안에 있다. 아모레퍼시픽 제공
윤독정 여사가 1930년대에 쓰던 기름 짜는 틀을 근래에 재현한 것.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의 서광다원(차나무 재배단지) 안에 있다. 아모레퍼시픽 제공
육남매를 키우는 40대 여인이, 그것도 단순한 상점도 아닌 제조업을 홀로 꾸려 가는데 왜 어려움이 없었을까. 오늘날 스킨로션이나 밀크로션에 해당하는 ‘미안수’를 개발했지만, 집집마다 고유의 방법으로 만들어 쓰는 관습에 막혀 실패한 적도 있었다. 동백기름 역시 질이 낮은 가짜기름이나 유사품 때문에 적잖은 피해를 보기도 했다.

특히 태양리화학, 동방화학, 동보화학 등이 생겨나면서 화장품 업계는 점차 대형화하고 있었다. 시세이도 등 일본 화장품 회사들도 조선 시장을 적극 노렸다. 이 와중에도 가내수공업에 불과한 창성상점은 오직 품질과 신용에만 ‘다걸기’ 했다. 언제나 가장 좋은 원료를 사용했고, 최고의 품질을 유지했다. 한 번이라도 거래 관계를 맺으면 그와의 신용은 생명처럼 지켰다. 고객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끼니때마다 식구 수보다 밥을 많이 해 누구든 찾아오면 따뜻한 밥을 대접했던 게 단적인 사례다. 이 같은 윤독정식 경영철학은 아들의 기업운영 원칙에도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서성환은 “우리 회사의 모태는 나의 어머니입니다. 우리 회사는 여성이 키운 기업입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80년 이어온 동백기름의 정신


서성환은 보통학교에 다니던 10대 시절부터 이른바 경영수업을 받았다. 1944년 강제징용을 당했다가 광복 후 중국에 머물던 그가 돌아온 것은 1946년 1월. 혈기 넘치던 스물둘 청년이 맨 먼저 한 일은 어머니의 동백기름 가게 간판을 ‘태평양상회’로 바꿔 단 것이었다. 더 큰 꿈을 이루겠다는 의지에서였다. 그리고 이듬해 서울 남대문시장 인근으로 이전해 ‘태평양화학공업사’를 출범시켰다. 어느덧 오십대 후반에 이른 윤독정은 자연스레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이후 태평양이 걸어간 길과 윤독정은 떼려야 뗄 수 없을 만큼 밀접하다.

1951년 개발한 국내 최초의 순식물성 포마드 ‘ABC 포마드’를 필두로 초기의 태평양은 유독 포마드 제품에 전력을 쏟았다.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대표이사 사장의 설명이다.

“아버지가 왜 화장품 사업을 하셨고, 어째서 포마드에 특히 관심이 많았을까 궁금했어요. 그래서 여쭤보면 대답은 늘 간단했어요. 가업이라는 거였죠. 할머니가 처음 만든 것이 동백기름이었으니 당연하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동백기름에서 포마드로 바뀌었을 뿐.”

태평양이 1954년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화장품 연구실’을 만든 것이나, 1958년 동양 최초로 높이 12m, 무게 4t의 ‘에어스푼(제분기)’을 들여온 것 등은 윤독정의 품질에 대한 신념을 계승한 결과였다. 그가 삼국시대부터 우리네 여인들이 사용했던 동백기름을 새롭게 재창조한 것처럼, 태평양도 한약재를 활용한 제품들을 지속적으로 개발해 왔다. 동백기름을 활용한 샴푸나 린스를 2000년대에 들어서도 꾸준히 생산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여성 기업가이자 과학자였던 윤독정의 치열한 삶과 정신을 기리기 위해 아모레퍼시픽은 창립 60주년을 맞은 2005년 ‘아모레퍼시픽 여성과학자상’을 제정해 매년 시상해오다 올해부터는 국제적으로 외연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행사 내용을 바꿨다. 8일 서울 중구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에서 열린 ‘2011 아시아 여성 에코과학기술 포럼’이 그것이다. 미국과학진흥협회(AAAS·학술저널 ‘사이언스’ 발행기관)의 앨리스 황 회장이 기조강연을 맡는 등 세계적인 여성과학자 400여 명이 포럼에 참석했다.
▼ 서경배 대표 “할머니는 美와 건강 일깨운 선구자” ▼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대표이사 사장(48)은 할머니 윤독정 여사가 세상을 떠나고 4년 후 태어났다. 할머니 품에 한 번도 안겨보지 못한 셈이다. 그렇지만 서 사장은 공식석상에서나 사석에서 회사의 산파 역할을 한 할머니를, 그리고 할머니의 동백기름을 자주 언급한다. 아버지인 고 서성환 회장이 그랬던 것처럼. ‘O₂’는 서 사장과의 서면 인터뷰를 통해 할머니의 유산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어봤다.

서성환 회장께서는 할머니를 어떻게 기억하셨나요.

“아버지께서는 할아버지보다 할머니에 대해 남다른 그리움을 갖고 계셨습니다. 할머니 산소에 가시면 한결 더 시무룩해지시곤 하셨죠.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 혼잣말처럼 ‘꼭 어머니를 만나야 할 텐데, 혹 내가 못 찾으면 어쩌나’라고 얘기하시던 게 기억에 남네요.”

‘기업가 윤독정’은 어떤 사람일까요.

“할머니는 최고의 품질을 만드는 게 상인이 가장 먼저 갖춰야 할 도리라는 것을 몸소 실천한 분입니다. 좋은 동백나무 열매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셨고, 그 재료로 누구보다 정성껏 제품을 만드셨죠. 그래서 자신이 만든 동백기름이나 화장품에 대한 자부심이 무척 대단했습니다.”

윤독정 여사가 만든 동백기름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할머니는 좋은 품질을 넘어 제품에 자신의 철학을 넣으려 하셨습니다. 그 영향으로 아버지는 ‘인류의 미와 건강을 실현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었습니다. 그 꿈이 지금의 아모레퍼시픽을 있게 한 거죠. 저 또한 그 정신을 물려받아 가치와 철학을 담은 ‘글로벌 명품’을 만들고자 합니다.”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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