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동아 문우회’ 회원들, 박완서 선생 추모문집 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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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5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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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미남 배우 얘기 나오면 수줍어하셨는데…”

《“아유, 요즘 그거 재밌더라. ‘발리에서 생긴 일’, 주인공 조인성이가 나는 좋던데.” 소설가 박완서 씨가 배우 조인성 씨 얘기를 불쑥 꺼냈다. “내가 조인성이가 좋다고 하니까, 조인성이랑 점심 먹을 자리를 마련해 주겠다고 하더라고….” “정말요? 드시죠. 사인도 받고.” “아유, 그렇게까지는…호호.” 박 씨와 후배 문인 유춘강 씨가 2004년 충남 당진에서 봄꽃놀이를 하고 올라오는 길에 나눈 대화의 한 토막이다. 좋아하는 남자 배우 얘기가 나오자 박 씨는 소녀처럼 수줍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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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서울 종로구 인사동 골목길에서 여성동아 문우회 회원들이 모임을 가진 뒤 기념촬영을 했다. 왼쪽부터 조혜경 이근미 유덕희 최순희 오세아 노순자 우애령 권혜수 박재희 박완서 씨. 예쁜 것을 유난히 좋아했던 박완서 씨는 박재희 씨가 아들의 졸업식을 맞아 산 꽃다발을 보고 ‘예쁘다’며 받아 품에 안았다. 문학동네 제공
2007년 3월 서울 종로구 인사동 골목길에서 여성동아 문우회 회원들이 모임을 가진 뒤 기념촬영을 했다. 왼쪽부터 조혜경 이근미 유덕희 최순희 오세아 노순자 우애령 권혜수 박재희 박완서 씨. 예쁜 것을 유난히 좋아했던 박완서 씨는 박재희 씨가 아들의 졸업식을 맞아 산 꽃다발을 보고 ‘예쁘다’며 받아 품에 안았다. 문학동네 제공
여성동아 문우회 24명의 문인들이 낸 추모문집 ‘나의 박완서, 우리의 박완서’(문학동네)에 실린 일화다. 문집에는 1월 타계한 박 씨가 후배 문인들과 나눈 솔직한 얘기들이 가득하다. 고인은 197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며 등단했고, 이후 여성동아 출신 문인들에게는 ‘큰언니’와 같은 존재였다. “선생님을 아끼는 수많은 독자에게 우리만이 간직한 선생님의 보드랍고 비밀스러운 추억들을 알려주고 싶었다”는 것이 출간 취지다. 수익금은 고인을 기리는 일에 사용할 예정이다.

박 씨는 문학계의 거목으로 불렸지만 사석에서는 스스럼없는 편한 선배였다고 후배 문인들은 책에서 털어놓았다.

“우리가 함께 모이는 자리에서 큰 소리로 무엇을 주장하거나 우기거나 하시는 법이 없었다. 그저 조용히 우리가 하는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을 듣고 계시다가 마지막에 한마디 보태시거나, 웃으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마치 눈앞에 삐악거리는 병아리들을 지켜보고 있는 어미닭 같았다.”(이혜숙)

“선배님은 신성우, 장근석, 이민호 등 그때그때 드라마에 나오는 꽃미남들을 멋지다며 좋아하셨는데, 나는 선배님의 이런 일면이 귀엽고 솔직하고 또 평범한 할머니 같아서 좋았다.”(최순희)

박 씨는 후배들에게 재미있는 얘기를 하다가 반응이 너무 좋으면 “내가 (소설로) 쓸 거야”라고 말해 좌중을 웃겼고, 문우회 명의로 부조금을 낼 때 자신의 돈을 더 얹어 봉투를 두툼하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글에 있어서만은 따끔한 질책을 아끼지 않은 엄한 선배였다. 방송국 중편 공모에 가명으로 신청했다가 당선된 권혜수 씨는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박 씨에게 뒤늦게 당선자가 자신이라고 밝혔다가 호된 꾸중을 들었다. “장편소설까지 당선된 사람이 문장이 그게 뭐냐. 소재가 진지해서 뽑았지만 문장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일침이었다.

다섯 아이의 엄마로 마흔 살에 등단한 박 씨를 두고 ‘슈퍼맘’이라 부르는 시선도 있지만 이남희 씨는 박 씨가 이렇게 말했다고 전했다.

“여태껏 나는 집안일 도와주는 사람 안 두고 산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도 매스컴에선 마치 내가 살림도 완벽하게 잘하면서 작가 생활을 하는 그런 사람인 것처럼 선전하는데, 잘못된 거예요. 난 세상에 슈퍼우먼은 없다고 생각해요.”

박 씨는 1988년 남편을 암으로, 외아들을 교통사고로 떠나보낸 뒤 깊은 좌절과 실의에 빠진다. 박 씨는 이해인 수녀가 있는 부산 성 베네딕도 수녀원으로 가서 마음을 추스르기도 했다.

긴 시간이 흐른 뒤 조양희 씨가 “훗날 아들을 다시 만나면 반갑지 않으시겠느냐”라고 묻자 박 씨는 눈을 흘기며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무슨 반갑기는. 어미보다 뭐가 더 급해서 먼저 가, 네가 왜 나보다 앞질러 가, 이 못난 녀석 같으니, 이 불효자, 맞아라, 맞아야 해.”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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