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 씨는 “자신의 의지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을 태어나게 만들수 있는 기회가 인생에 한두 번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전북 무주의 한 리조트에서 자기 자신에게 ‘제2의 삶’을 부여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그녀는 언제나 ‘좋은 사람’이고자 했다.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학교에서 배운 대로 착실하게 살았다. 남들이 아주 부러워할 만한 삶은 아니더라도 큰 결격 사유 없이 많은 것을 하나씩 갖춰 나갔다. ‘질풍노도의 시기’라 흔히들 말하는 사춘기마저도 조용히 흘려보냈던 그녀는 35세가 된 1994년 10월의 어느 날 처음으로 ‘사고’를 쳤다.
“‘벽아, 벽아, 너 왜 말 못하니?’ 너는 분명히 그러다 돌아올 거야.”
다니던 출판기획사에 한 달 동안 휴가를 낸 그녀에게 누군가 했던 말이 자꾸 귓가를 맴돌았다.
남의 손에 잠깐 맡긴 초등학교 1, 2학년 아들과 딸도 걸렸다. 혼자 차를 몰고 전북 무주군 적상산에 자리 잡은 휴양 시설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혼자 떠나보는 여행이었다.
불빛 하나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길은 불안을 더욱 부채질했다. 꼬불꼬불한 산길을 40분째 달리고 있지만 마주 오는 차 한 대 없었다. 워낙 길눈이 어두운 탓에 길을 잘못 들어 몇 번을 차를 돌려 돌아 나왔는지 모른다.
‘이렇게 떠나왔지만 결국 소용없는 일이었으면 어쩌지? 호강에 겨워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은 아닐까? 그냥 그대로 살아도 되는 건데….’
아직도 초보운전 딱지를 떼지 못했던 그녀에겐 모든 것이 불길하기만 했다.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룸미러로 슬쩍슬쩍 보이는 뒷자리에는 누군가 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신나는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무슨 노래를 어떻게 불렀는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살다 보니 불현듯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 믿고 따랐던 사회의 틀 속에서 오히려 아픔을 느꼈다. 취업, 결혼 등 사회에서 정해놓은 순서를 성실히 밟아왔던 삶이 달력 한 장 한 장을 넘기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알 수가 없었다. 언젠가 소설에 썼던 문장처럼, 이렇게 똑같은 삶을 복제하면서 살다 갈 것이라면 나는 왜 태어난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 생활도 생각하고 꿈꿨던 것과 달랐다.
“저녁밥을 함께 먹으며 서로 고민을 나누고, 한 사람이 슬프면 달려와 위로해주고, 단 하나의 비밀도 없어야 한다고 상투적으로 생각했던 거죠. 그런데 내가 갖고 있던 결혼상은 현실에서는 충족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그녀는 ‘나만의 방’을 찾아 나섰다.
서울에서는 오후에 출발했다. 3시간이면 도착할 거리였지만 오후 10시가 넘어서야 리조트에 도착했다. 열쇠를 받아 방을 찾아가면서도 오늘밤만 자고 다시 집으로 돌아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계속 머리를 맴돌았다.
하지만 문을 열고 그 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발이 붕 뜨며 ‘자유’를 느꼈다.
“나를 바꿔 스스로 다시 태어나,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서의 삶이 새롭게 시작되는 순간이었어요.”
지금까지 살아왔던 모든 것에서 완전히 단절된, 우주에 떠있는 듯한 하나의 낯설고 독립된 공간이 그녀를 맞았다. 지금까지는 어떤 공간이든 항상 목적이 있었고, 그 안에서 주어진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그 방에는 아무런 목적도, 의무도 없었다. 누구의 시선도 없는 그녀만의 독립된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2007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영국 작가 도리스 레싱의 단편소설 ‘19호실로 가다’에도 자신만의 공간을 꿈꾸던 평범한 40대 여성이 등장한다. 평범한 남편과 네 명의 아이들 속에서 평범한 날들을 살던 그녀는 어느 날 작은 호텔의 19호실을 발견하고, 그 방을 찾아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앉아 있거나 누워 있다가 돌아오곤 한다. 하지만 부인의 외도를 의심한 남편은 그녀만의 공간을 침범하고, 그녀는 19호실로 들어가 가스를 틀어놓고 영원히 그 방 속에서 잠이 든다.
그녀도 비슷했다. “다른 사람들은 ‘저 여자가 뭐가 부족해서 그러나’라고 생각할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독립된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 것이 누군가에겐 극단적인 결핍이 될 수도 있답니다. 인간 개개인이 다른 만큼 누구나 마음속에 이 세상의 틀로는 재단할 수 없는, 자신만의 우울과 불안, 뜻밖의 기쁨이 있을 수 있지요.”
그 방에서 그녀는 지금까지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모든 사회적 시선을 벗어던졌다. 몸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다.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을 의무적으로 해내던 그녀는 줄을 끊어버리고 스스로를 방치했다.
“유치하지만 모든 규칙 같은 것들을 지키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어요.”
떠나기 전까지 죄를 짓는 것 같아 아침 늦게까지 침대에 누워있지도 못했지만,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었다.
그렇게 며칠이 흘러갔다. 어느 순간 그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공부하던 습관처럼 ‘내가 누구인지’를 다섯 가지로 나눴다. 직장인으로서의 자신은 ‘먼지 속의 나비’로 그려냈고 아내로서의 자신은 ‘빈처’에 담았다. 인간 존재로서의 자신은 ‘지구 반대쪽’에, 딸로서의 자신은 ‘멍’에 풀어냈다. 여자로서의 자신도 글에 담아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단편소설 5편을 썼다. 방에서 그녀는 스스로 강해졌다.
휴가가 끝나고 그녀는 다시 가족과 직장의 품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글쓰기는 계속됐다. 퇴근하고 나서 틈틈이 첫 중편 ‘이중주’를 썼다.
“그 이후 이상하게 탄력이 붙었어요. 이전에 나를 괴롭혔던 문제들이 갑자기 해결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게 내 인생에서 그렇게 중요했어? 나는 혼자서도 이런 것들을 할 수 있잖아’라는 자신감을 얻었던 것 같아요. 내가 나를 다시 태어나게 했다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결국 그녀는 ‘이중주’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서른여섯 나이에 소설가가 됐다. 동시에 그 방에서 썼던 단편소설 4편도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5편 중 여자로서의 자신을 담아냈던 단편 하나만이 여전히 서랍 속에 잠들어 있다.
소설가 은희경 씨(52)는 지금도 새로운 소설을 쓸 때면 낯선 곳을 찾는다.
“낯선 생각을 해 볼 수 있는 경험이 그 방에서부터 비롯됐죠. 하지만 다시 태어나기 위해 무조건 멀리 오래 떠나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가벼운 산책이나 처음 맛보는 차 한 잔도 낯선 각성을 줄 수가 있죠. 중요한 것은 낯설고 먼 여행지가 아니라 나를 보호해주고 내가 의존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용기가 아닐까요?” ▼ 다시 찾아간 ‘나만의 공간’ 소나무들의 웃음소리만… ▼
17년 전 어느 밤 그녀가 찾아든 방은 이런 모습이었을까. “언제 자기 자신이 독립했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이제 나다’라고.”
인터뷰를 시작하며 던진 질문에 오히려 그녀가 되물어왔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재빨리 지난날을 돌아봤다.
“아직 못 찾았을 수도 있어요.”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15일 그녀가 홀로 올랐던 그 산길을 따라 무주리조트로 향했다. 그녀의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말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괜스레 마음이 설렜다.
17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왕복 2차로의 꼬불꼬불한 그 길에는 여전히 가로등 하나 서 있지 않았다. 15분을 달렸지만 마주 오는 차 한 대 보이지 않았다. ‘위험, 천천히’라는 빨간색 푯말만이 반복적으로 차창 밖을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하지만 내비게이션에서 흘러나오는 친절한 여성의 목소리는 그녀처럼 길을 잘못 들어설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머물던 방의 호수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가 머물렀던 방도 찾을 수 없었다. 리조트 관계자는 시간이 흘러 방들 내부를 새롭게 꾸몄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전망이 가장 좋다는 객실을 찾아 들어갔다.
창문을 여니 산으로 둘러싸인 리조트의 전경과, 그녀가 방을 찾았을 때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소나무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깊게 내려앉은 산 속의 적막 속에서 이름을 알 수 없는 정겨운 새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문득 그녀도 이 새소리를 들었을지 궁금했다.
베란다로 나서자 건물 아래로 중년 남성 한 명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깊게 들이마셨던 담배 연기가 허공에 흩어졌다. 그녀가 들어섰던 리조트 입구에는 천막을 치고 음식을 팔던 사람들 대신 대형 음식점과 스키숍, 모텔들이 들어섰지만, 여전히 수많은 방들이 사연을 간직한 또 다른 누군가들을 그날도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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