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가 본 이 책]가장 원초적인 몸짓, 질주 본능을 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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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3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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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닝, 한 편의 세계사
토르 고타스 지음·석기용 옮김 744쪽·3만2000원·책세상

김경집 인문학자·가톨릭대 인간학교육원 교수(오른쪽)
김경집 인문학자·가톨릭대 인간학교육원 교수(오른쪽)
우리 대부분은 걷는다. 때로는 달린다. 언제 달리는가? 출발하기 직전의 버스나 문이 닫히기 전의 지하철을 향해 달린다. 달리는 건 분명 걷는 것보다 목적지향적이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는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하기 위해 백성들 앞에서 달려야 했다. 잉카제국에서 소식을 전달하는 전령의 지구력과 속도는 나라의 힘과 질서를 유지할 수 있게 해준 근간이었고, 그리스인들은 신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달렸다. 그런가 하면 아메리카 대륙의 나바호족은 젊은이를 강하게 키우기 위해, 호피족은 비를 내리게 하기 위해 달렸다. 그들에게 달리기는 사람들을 결속시키고 부족과 신을 한데 연결시키는 실마리였으며 또한 매우 실용적인 기술이기도 했다.

이 책의 저자 토르 고타스는 노르웨이의 민속학자이자 작가로 민속학적 관심에서 접근한 역사서들을 주로 써왔다. 이 책 역시 방대한 자료와 이에 바탕을 둔 사실의 복원에 충실하다. 달리기라는 주제로 이렇게 묵직한 책을 썼다는 게 경이로울 정도다. 역사적 사실과 신화, 전설 사이를 넘나드는 저자의 호기심과 지식은 넓고도 다채롭다. 무엇보다 풍부한 사례와 명쾌한 문장으로 달리기에 대한 다양한 정보뿐 아니라 문화사를 읽는 즐거움까지 만끽하게 한다.

2011년 서울국제마라톤대회. 42.195㎞를 달리 는 마라톤은 1896년 제1회 근대올림픽 정식종목 이 된 이래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2011년 서울국제마라톤대회. 42.195㎞를 달리 는 마라톤은 1896년 제1회 근대올림픽 정식종목 이 된 이래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김동주 기자 zoo@donga.com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 예찬’이 철학적 사유를 담뿍 담았다면 이 책은 충실한 현장감과 역동성으로 문화적 다양성을 경험하게 한다.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다이어트를 위해, 혹은 아주 잠깐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고 달릴 게 아니라, 가장 원초적이며 역동적인 우리 몸의 작동 체계인 ‘달리기’를 넓은 지평으로 보면 거기 삶이 있고 문화가 있으며 역사가 꿈틀댄다는 걸 보여준다.

사실 저자가 이 책에서 달리기의 역사를 근대 이전과 이후로 나누지는 않았다. 그런데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근대 이전의 달리기와 이후의 달리기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확연히 구분된다. 근대 시민사회에서 달리기가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성행했는지에 대한 저자의 상세한 추적을 통해 우리는 근대의 단면을 발견하게 되는 셈이다. 이렇게 보는 달리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이다.

식민지 케냐를 다스리던 영국이 조직화된 영국식 스포츠를 도입하여 훗날 아프리카 육상을 발흥시켰다는 사실(물론 그들은 스포츠의 사회 통제 역할을 더 염두에 두었지만)이나, 오늘날 한국에서도 전통적으로 이어지는 ‘역전(驛傳) 마라톤’이 사실은 일본이 수도 이전 50주년을 기념해 예전의 수도인 교토와 현 수도인 도쿄 사이를 달린 데서 연유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소속 집단에 대한 충절을 증명하려는 일본인들의 특성 때문에 유독 더 인기를 얻었다는 사실에서 아연함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한편으로 이 책에서 전설적인 달리기 영웅들을 만나는 즐거움 또한 결코 가볍지 않다. 파보 누르미와 에밀 자토펙, 오늘날 이 두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핀란드는 1912년 올림픽 육상에서 세 개의 금메달을 땄지만 점령국 소련에 그 명예를 넘겨야 했다. 마치 우리나라의 손기정처럼. 그러나 핀란드는 좌절하지 않았고 마침내 불세출의 마라토너 누르미를 통해 기어코 핀란드의 이름으로 마라톤을 제패했다. 그는 1920년대 내내 마치 기계처럼 정기적으로 세계기록을 갈아 치운 비범한 육상 천재였다. 오죽하면 미국의 한 은행가가 핀란드에 유리한 조건의 신규 대출을 제안했을까! 누르미 같은 천재를 배출한 나라라면 신용할 만하다는 이유였다.

고대 그리스·로마시대 항아리 ‘암포라’
에는 달리는 남자의 그림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그리스·로마인들은 신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달렸다.
노르웨이 민속학자인 저자는 인간 역사에서 가장 오랜 스포츠인
달리기의 문화사를 짚어본다. 동아일보DB
고대 그리스·로마시대 항아리 ‘암포라’ 에는 달리는 남자의 그림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그리스·로마인들은 신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달렸다. 노르웨이 민속학자인 저자는 인간 역사에서 가장 오랜 스포츠인 달리기의 문화사를 짚어본다. 동아일보DB
또한 체코의 인간기관차 자토펙은 영웅 중의 영웅이었다. 그는 단일 올림픽에서 5000m, 1만 m, 마라톤까지 제패한 전무후무한 역사를 만든 위대한 철각이었지만 그의 진정한 매력은 겸손한 인간미였다. 마치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 사실적인 누르미와 자토펙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이 책의 후반부는 현대 세계 육상의 생생한 역사 그 자체다. 나이키 브랜드의 탄생 비화와, 일본과 중국 육상의 괄목할 만한 부상에서부터 몰락한 육상 스타 매리언 존스에 이르기까지, 흥미로운 사실로 가득해서 제법 두툼한 책인데도 읽기에 지루하지 않다. 이 긴 책을 완주하고 나면 저절로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를 느끼게 될 듯하다.

특히 달리기 애호가들이라면 이 책을 놓치지 말기 바란다. 자신의 취미 활동에 담긴 역사와 문화 그리고 풍부한 스토리를 알고 달리는 것과 모르고 달리는 것은 확연히 다를 테니 말이다. 바탕과 거리 그리고 소재와 주제가 만나면 우리도 어엿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 이야기는 그냥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러너들이여, 우리가 스토리텔러가 되자!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이라면 옮긴이도 지적한 것처럼,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를 배출한 우리나라 육상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다는 점과, 세계사라고는 하지만 결국 서구적 관점에 충실하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걸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트집 잡을 일만은 아니다. 우리가 이런 걸 자꾸 써야 한다. 우리 역사가들의 분발을!

김경집 인문학자·가톨릭대 인간학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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