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노비詩人 정초부’ 한시집 찾았다

  • Array
  • 입력 2011년 2월 28일 03시 00분


코멘트

■ 성균관대 안대회 교수, 90여 수 담긴 ‘초부유고’ 발굴

정초부가 지은 약 90수의 시가 들어 있는 초부유고(樵夫遺稿) 일부. 가는 글씨로 베껴 쓴 필사본 형태다. 당대의 문인인 정약용 박제가 이학규의 작품들과 한 책에 묶여 있다. 안대회 교수 제공
정초부가 지은 약 90수의 시가 들어 있는 초부유고(樵夫遺稿) 일부. 가는 글씨로 베껴 쓴 필사본 형태다. 당대의 문인인 정약용 박제가 이학규의 작품들과 한 책에 묶여 있다. 안대회 교수 제공
조선시대 노비가 지은 한시집이 발굴됐다. 조선 정조 때 활약했던 노비 시인 정초부(鄭樵夫·1714∼1789·‘정씨 나무꾼’이라는 뜻)의 한시집 ‘초부유고(樵夫遺稿)’로 약 90수의 한시가 실려 있다.

안대회 성균관대 교수(한문학)는 27일 그동안 다른 문헌을 통해 그 존재만 알려졌던 ‘초부유고’를 고려대 도서관에서 발견했다고 밝혔다. 이번에 발견된 초부유고는 18세기 일급 문인으로 분류되는 정약용 박제가 이학규 등 4명의 시만 골라 묶은 필사본 시집 ‘다산시령(茶山詩零)’에서 발견돼 정초부의 명성이 대단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지금까지는 정초부의 주인이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았으나 안 교수가 이번에 여춘영(呂春永·1734∼1812)의 문집 ‘헌적집(軒適集)’도 함께 찾아냄에 따라 그의 생몰연도, 정초부와 주인의 관계 등이 명확해졌다.

정초부의 이름은 봉(鳳)일 가능성이 높은데 이번에 발굴된 초부유고에는 이재(彛載)라는 이름으로도 나온다. 정초부는 부모 모두 노비였던 것으로 보인다. 17세기 노비 출신으로 젊은 나이에 양인이 된 홍세태(洪世泰·1653∼1725)나 18세기 또 다른 노비 시인으로 불리는 이단전(李亶佃·1755∼1790)의 아버지가 노비가 아니었던 것과 다른 점이다. 안 교수는 “조선 전체를 통틀어 노비 시인으로 불릴 만한 작가는 5, 6명이지만 완전한 의미에서 노비 시인의 작품집이 발견된 것은 사실상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정초부의 주인이었던 여춘영은 조선 후기 문벌가문의 일원으로서 자기보다 스무 살 많았던 노비 정초부를 인간적으로 대등한 관계로 대했다. 여춘영은 1789년 정초부가 76세로 사망하자 만시(輓詩) 12수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어릴 때는 스승, 어른이 되어서는 친구로 지내며, 시에서는 오로지 내 초부뿐이었지(少師而壯友, 於詩惟我樵)”라는 구절이 나와 두 사람의 돈독했던 관계를 짐작하게 한다.

단원 김홍도의 도강도(혹은 도선도). 정초부가 동호의 풍경을 읊은 시가 쓰여 있다. 정초부의 시는 당대에 회자되면서 글자가
고쳐지기도 했는데 맨 앞 글자가 원문과 달리 높을 고(高)자로 돼 있다. 그림 출처 진준현 저 ‘단원 김홍도 연구’
단원 김홍도의 도강도(혹은 도선도). 정초부가 동호의 풍경을 읊은 시가 쓰여 있다. 정초부의 시는 당대에 회자되면서 글자가 고쳐지기도 했는데 맨 앞 글자가 원문과 달리 높을 고(高)자로 돼 있다. 그림 출처 진준현 저 ‘단원 김홍도 연구’
정초부의 재능을 한양의 사대부 사회에 널리 퍼뜨릴 정도로 그의 재주를 아꼈던 여춘영은 정초부가 죽자 자신의 아들 둘을 데리고 정초부의 무덤을 찾아가 그를 기리는 제문을 짓기도 했다.

정초부는 나무를 하는 노비였다. 어린 시절 낮에는 나무를 하고 밤에는 주인집 자제들이 배우는 글을 어깨너머로 배웠다. 정초부가 어린 시절 읊는 한시를 외우는 것을 본 주인이 이를 기특하게 여겨 한자를 가르친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시는 서정성이 풍부하고 회화적인 것이 특징이다. 오늘날 한강 동호대교 부근의 풍경을 읊은 시는 당대에 특히 유명해 단원 김홍도가 ‘도강도(혹은 도선도)’를 그릴 때 그림의 시구(화제·畵題)로 사용했다.

안 교수는 “정초부는 천부적 재능이 있어 한시를 지었지만 학문이 깊지는 않아 교양인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글자로 시를 지었다. 이 때문에 오히려 많은 사람이 더 친숙하게 받아들였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초부가 시를 잘 짓는 노비로 명성을 얻음에 따라 그가 살던 양근현(지금의 경기 광주시 남종면 수청리)에는 길을 지나던 사대부들이 그를 보러 그의 집을 방문하곤 했다. 가까이 살던 수원 부사를 지낸 김상묵(金尙默·1726∼1779)도 그와 친분을 나누었다. 당대 노론 사대부의 폐쇄적 시회였던 ‘동원아집(東園雅集)’에 불려가 고관을 지낸 인사들과 함께 시를 짓기도 했다.

안 교수는 “그가 남긴 약 90수의 시는 서정적이고 조금은 우수에 찬 느낌”이라며 “노비가 한시작가로 두각을 나타낸 현상은 18세기 조선 문화계에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던 시기였음을 보여주는 표지”라고 말했다.

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