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진성은 제 아내가 다른 사람과 몰래 간통하는 것을 목격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단지 간부(奸夫)가 세력이 있는 자였기 때문에 분풀이를 할 수 없었다.”
18세기 후반 형사판례집 ‘심리록’에 등장하는 한 살인사건에 관한 정조의 판결 중 일부다. ‘심리록’에는 간통을 계기로 남편이 아내나 간부를 살해한 사건이 여러 건 등장한다.
정병설 서울대 국문과 교수는 이 구절을 이렇게 풀이한다. “주목할 점은 남편이 간부를 두려워했다는 사실이다. 뒤집어 말하면 간부들이 발각을 두려워하며 은밀히 간통을 한 것이 아니라 드러나게 떳떳이 간통했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이 같은 내용이 담긴 논문 ‘조선후기 성(性)의 실상과 배경’을 이달 말 발간하는 학술지 ‘인문논총’에 게재할 예정이다. 정 교수는 이 논문에서 성소화집(性笑話集·음담패설류의 책) ‘기이재상담(紀伊齋常談)’과 법전 등을 통해 여러 각도에서 조선 후기 성문화를 분석했다. 결론은 “조선 후기의 성은 전체적으로 억압되지 않았다. 다만 신분질서 유지를 위해 상층 여성의 성적 폐쇄성을 강화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위의 판례에서처럼 하층 여성은 자신의 소대남편(샛서방)을 본남편이나 시집에 숨기지 않았다. ‘화처’라는 단어에서도 이 같은 성적 개방성이 드러난다. ‘화처’는 하층 남성의 첩을 가리키지만 양반의 첩과는 다르다. ‘정조실록’에는 한 평민여성을 두고 “이름이 화처지만 그냥 길에서 만난 사이와는 다르며 결혼한 근거도 있고 사는 집도 뚜렷하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화처가 명목상 첩일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처와 다를 바 없다는 말이다. 조선 후기 양인 박의훤의 재산 상속 문서를 보면 다섯 부인을 뒀고 그 자식 모두에게 재산을 나눠줬다. 그중 다섯 번째 외에 다른 아내는 모두 다른 남자를 만나 떠났다. 이 시기 하층민들의 개방적인 혼인 풍속을 보여준다.
‘경국대전’을 보완한 법전 ‘속대전’에서도 성에 대한 규제는 가까운 친척과의 간음을 규제하거나 선비집 부녀의 성적 문란 또는 그 부녀에 대한 성폭행을 엄히 규제하는 정도다. 하층 남성과 상층 여성의 관계를 단속해 양반 사회의 신분 질서를 더욱 공고히 지키기 위한 것일 뿐 하층민끼리의 성적 개방성은 규제 대상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정 교수는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상층 남성들이 축첩(蓄妾)을 일삼는 상황에서 하층 남성에게 일부일처제는 구조적인 성적 결핍을 의미했다. 소대남편이니 화처니 하는 일종의 중복혼(重複婚)은 그에 대한 대응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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