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온몸으로 운명의 신에 저항할거야…

동아일보 입력 2010-09-14 03:00수정 2010-09-14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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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이오카스테’…대본★★★★ 연기★★★★ 연출★★★☆ 무대★★★☆
“신들이여, 이제, 이 가련한 피조물의 분노를 보라. 인간이, 바람에 나부끼고, 너희 발아래 짓밟히는 한낱 낙엽 같은 인간이, 그 무력함으로써 분노하노라.” 오이디푸스신화를 그 최대 희생자인 이오카스테의 시각에서 도발적으로 재구성한 연극 ‘이오카스테’에서 이오카스테로 분한 이서림 씨. 사진 제공 실험극단
그리스신화가 구약성서라면 그리스비극은 신약성서다. 전자가 불가해한 신 중심의 이야기라면 후자는 약점 많은 인간 중심의 이야기다.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는 그 변곡점에 위치한 작품이다.

본디 이 극은 인간이 만물의 척도임을 주장한 소피스트들을 겨냥한 작품이었다. 델피의 아폴론 신전에 적혀 있던 ‘너 자신을 알라’라는 경구를 통해 신의 권능과 지혜에 도전한 인간(오이디푸스)의 비참한 말로를 극화했기 때문이다. 영웅의 반열에 오른 인간이 스스로의 오만함(hubris)으로 인해 몰락하는 것이 곧 그리스비극이란 공식도 이로부터 시작됐다.

후대의 비평가들은 신들의 불합리함을 통렬히 고발하는 이 작품의 목소리에 주목했다. 오이디푸스는 신들이 쳐놓은 운명의 덫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굴복하지도 않는다.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하고, 그것에 따른 책임과 결과가 아무리 불합리한 것이라도 홀로 짊어진다.

그래서 그는 자결하기보다는 스스로 두 눈을 찌르고 살아남기를 택한다. 그럼으로써 신에 도전한 자의 비참한 본보기로 남기보다는 신의 가혹함을 온몸으로 고발하는 존재가 된다. 신에 의한 파멸을 인정할지언정 자기포기라는 패배는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프랑스 문학평론가 지라르가 오이디푸스에게서 십자가를 짊어진 예수의 형상을 발견한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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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실험극장이 창단 50주년 기념공연으로 준비한 창작극 ‘이오카스테’(박정희 연출)는 이런 희생양 중심의 시각을 오이디푸스(반상윤)의 어미이자 아내인 이오카스테(이서림)로 바꿔 증폭시킨다. 오이디푸스에 대한 저주는 아비 라이오스 왕(강진휘)의 죄에서 비롯한다. 또한 오이디푸스는 의도했건 안했건 아비를 살해한 죄를 짓는다.

하지만 이오카스테는 죄가 없다. 가부장제적 질서를 충실히 좇은 결과 남편의 강압에 따라 자기가 낳은 아기를 뺏겼고, 오라비(크레온)의 약속에 따라 스핑크스를 죽인 영웅 오이디푸스를 새 남편으로 맞이했을 뿐이다. 그저 남편과 자식을 사랑한 죄밖에 없었던 이 무고한 여인은 신들의 정의를 위한 복수의 수단으로 쓰인 뒤 ‘부정 탄 여인’으로 폐기된다.

2004년 이 작품으로 옥랑희곡상을 수상하며 극작가로 데뷔한 이헌 씨는 이오카스테를 ‘복수의 여신’으로 야심차게 불러낸다. 그리고 소포클레스의 원작을 도발적으로 뒤집는다. 원작에선 수치심을 못 이긴 이오카스테가 자결한 뒤 오이디푸스가 두 눈을 찌르고 방황한다. 반면 이 연극에선 오이디푸스가 자결하고 이오카스테가 살아남아 가부장적인 신들의 횡포를 고발한다.

이 작품의 독창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오카스테와 스핑크스(박윤정)는 오이디푸스를 잡기 위해 신들이 쳐놓은 덫이란 공통점을 토대로 동일 운명체가 된다. 여성성을 지닌 괴물로서 스핑크스는 오이디푸스에 대한 사랑 때문에 목숨을 내놓고, 이오카스테를 향한 오이디푸스의 비탄어린 사랑이 흐르는 피 속에서 부활한다. 부활한 스핑크스는 이오카스테를 대면한 순간 자신을 ‘오이디푸스의 신부, 이오카스테 당신’이라고 소개한다.

이 연극 속 이오카스테는 신에게 저항한 그의 아들 오이디푸스와 가부장적 질서에 집요하게 맞선 딸 안티고네가 합쳐진 모습이다. 신비롭고 매력적인 스핑크스 역을 극단 백수광부의 ‘안티고네’에서 안티고네 역으로 열연을 펼쳤던 박윤정 씨가 맡았다는 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서는 이유다.

가냘픈 몸매와 날카로운 눈매로 신들의 발아래 짓밟히는 낙엽 같은 인간의 무력함과 분노를 복합적으로 담아낸 이서림 씨, 또한 오이디푸스의 저주받은 운명을 폭로하는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와 라이오스 왕의 1인 2역을 소화한 강진휘 씨의 연기도 기대 이상이었다. 그리스신화 속엔 없는 지옥의 개념이 등장한다거나 스핑크스와 문답에서 도교적 색채가 지나치게 짙은 선문답을 끼워 넣은 것은 ‘옥에 티’로 보인다. 그러나 올해 창작극 중 가장 치열하고 묵직한 작품으로 손꼽기에 부족함이 없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i: 2만 원. 19일까지 서울 종로구 대학로 연우소극장. 02-889-3561, 3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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