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킬러를 설계한 보스…설계를 거부한 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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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8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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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들/김언수 지음/424쪽·1만2000원/문학동네

‘설계자들’은 때마침 잔혹영화에 대한 설전이 뜨거운 한가운데 도착했다. 하필이면 주인공은 킬러, 하필이면 그 킬러가 사람 여럿 죽이는 얘기다.

그러면 이 이야기는 잔혹할까? 그렇다. ‘피칠갑 묘사’를 기대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렇진 않다. 외려 어느 편인가 하면, 이른바 잔인한 장면에 대한 작가의 묘사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찌르고 찔려 피가 흐르는 몸 곳곳을, 한 문장 쓰고 깨끗하게 닦아주고, 또 한 문장 쓰고 깨끗이 닦아주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러나 이 소설은 잔혹하다. 어쩌면 이 세상의 사람들이, 당신과 내가, 마치 서로를 칼로 난도질하듯 물어뜯는 게임을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체를 싹둑싹둑 자르고 피를 철철 뿌리는 영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섬뜩함을 준다.

주인공 래생은 설계자들의 설계에 따라 사람을 죽이는 청부살인업자다. 그는 암살 청부집단인 ‘개들의 도서관’에 속해 있다. 실제로 20만 권의 장서를 갖춘 도서관인 이곳의 관장은 너구리 영감이며, 나자마자 쓰레기통에 버려졌던 래생은 그에게 입양됐고 킬러로 길러졌다. 래생이 설계자들의 설계 그대로 사람을 죽이지 않게 되면서 자객들의 세계에는 균열이 생긴다.

김언수 씨는 새 소설 ‘설계자들’에서 암살청부집단 ‘개들의 도서관’을 등장시켜 선악의 구분이 모호한 세계를 그린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김언수 씨는 새 소설 ‘설계자들’에서 암살청부집단 ‘개들의 도서관’을 등장시켜 선악의 구분이 모호한 세계를 그린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사팔뜨기 여자 사서가 지키고 있는 미로 같은 도서관, 낮에는 죽은 애완동물을 태우고 밤에는 죽임당한 사람을 태우는 화장장, 솜씨 좋게 사람을 죽이는 킬러 이발사가 운영하는 이발소, 래생 한자 추 같은 이국적인 이름의 킬러…. 한국 사람이 쓴 것 같지 않은 이 소설을 읽으면서 영화에 나올 법한 가상 도시를 그려보다가도, 독재와 군부시절을 지나 맞게 된 민주화시대, 대선 때 정치자금을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중 분해되는 대기업 등 ‘실제 상황’을 작가가 무심하게 흘릴 때 읽는 이는 서늘해지지 않을 수 없다. 치토스 인형이 물고 있는 거품에 적힌 글귀 ‘넌 하늘의 신 제우스, 난 과자의 신 치토스’ 같은 소설 곳곳의 유머는 웃음을 헉, 터뜨리게 하면서도 쓸쓸함을 자아낸다.

캐릭터 하나하나에 대한 묘사가 치밀하고 주인공 래생은 대단히 매력적이다. 오래 연습한 바이올린을 연주하듯 몸에 밴 기술에 따라 사람을 죽이는 이 사내는 할 일이 없으면 도스토옙스키의 ‘악령’ 같은 책을 읽는다. 자기를 좋아하는 여공과 잠깐의 안락한 생활을 누리지만, “그럼 거기서 살아”라는 너구리 영감의 지시에 도서관으로 돌아온다. 죽음의 위협에 대해 담담한 것도 아니다. 변기에 설치된 폭탄을 발견하고는 컴퓨터며 쓰레기통이며 냉장고며 소파를 미친 듯이 뒤지고 분해하는, 두려움을 아는 인간이다. 시간이 비면 책을 읽는 이 사내의 운명은 그 책 때문에 정해져 있다. 일찍이 어린 래생이 책을 읽는 것을 발견한 너구리 영감의 호통. “책을 읽으면 부끄럽고 두려운 삶을 살 것이다.” 그의 삶이 ‘설계’대로 이뤄지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엇나간 인생은, 타인의 등에 쉽게 칼을 꽂는 ‘우리’보다는 부끄러움을 아는 삶이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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