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걸으니 청산도 앞바다의 숨비소리가 들린다. 해녀들이 물 위로 올라와 훅 하고 내쉬는 숨소리. 장흥 보림사의 넓은 뜰에 선 단풍나무 잎들이 햇살에 몸을 뒤척이는 모습이 보인다. 마지막까지 결코 아름다움을 잃지 않겠다는 듯 처연하게 달려있는 이파리들. 소설가 장정희 씨의 우리나라 슬로시티 여행기다. 세계 슬로시티연맹 본부의 실사를 거친 국내 슬로시티 중 다섯 곳(전남 완도 청산도, 장흥 유치, 신안 증도, 담양 창평, 경남 하동 악양)을 다니면서 기록했다.
악양 가는 길에 들른 한 아낙의 집에선, 버려진 매화 가지를 꽂아놓은 옹기그릇도 황홀해 보였다. 신안 증도의 태평염전에 이르러서 왜 소금이 소금(小金)으로 불리는지 알았다. 시간과 고요 속에서 영근 소금 알갱이를 보면서 급하다고 다그칠 수 없는 기다림의 미학을 배운다. 창평 명옥헌에서는 숨이 멈출 듯한 장면을 본다. 빨갛게 핀 배롱나무 꽃가지들 속으로 우뚝우뚝 선 적송(赤松)이 섞여들고, 그 위로 하늘만이 새파란 풍경이다. 느리게 거닐면서 깊이 사색하니 이렇게 몸과 마음이 호사를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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