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처럼 짧게 깍은 머리는 희끗희끗한데 날렵한 체구에서 나이를 읽기 힘들다. 말과 행동은 절제돼 있으나 대화를 나누면 마음의 여린 결이 엿보인다.
서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프랑스 정부의 국비 유학생으로 뽑혀 1969년 파리로 건너갔다 정착한 재불화가 이자경 씨(66). 5월25일까지 서울 서초구 양재동 ‘아틀리에 705’(02-572-8399)에서 열리는 전시를 위해 서울을 찾은 그는 조금 긴장한 표정이다. 86년 가나화랑 전시 이후 한국에서 처음 갖는 개인전이기 때문이다. 그도, 고국도 무심했다.
초기작에서 신작까지 선보인 전시에선 소재가 눈길을 끈다. 72년 스튜디오가 불에 타는 시련을 겪은 작가는 새 화실에서 뜯어진 이사용 종이 박스를 우연히 발견한다. 골판지의 ‘상처’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낸 작가는 그때 이후 골판지 작업에 매달려 왔다.
“골판지에는 골 안으로 들어간 부분과 바깥으로 튀어나온 부분의 대조에서 독특한 아름다움이 나온다. 물감을 직접 섞지 않아도 골판지 작품은 색의 대비를 통해 시각적 혼합효과가 생겨난다.”
올록볼록한 골판지를 자르고 색칠하고 나무를 덧대 완성한 작품에는 평면과 입체의 느낌이 살아있다. 빨강과 파랑, 빨강과 초록, 노랑과 파랑 등 골판지에 덧입힌 물감은 반복적인 선을 따라 빛과 그림자 효과를 확장시킨다. 직선으로 이어진 화면에선 엄숙함 보다 선과 면의 조화로 인해 율동감이 물결친다. 이밖에 캔버스 위에 작은 오브제들이 흐트러져 있거나 질서정연하게 배열된 네모 중 한 개가 대열을 이탈한 작품에선 자유분방함이 느껴진다. 꼼꼼하고 완성도가 높은 작업이다.
그의 작품은 극과 극이 대립하지 않고 공존하면서 울림을 남긴다. 기하학적 구성에 선명한 색상을 결합한 작품에선 동서양 문화가 사이좋게 서로에게 스며든다. 서구적이면서 동양적 분위기를 풍긴다. 화려하면서도 정적이며, 조형적 질서 안에 불규칙성이 녹아있다.
“한국에서 산 시간보다 훨씬 긴 시간을 유럽에서 보냈다. 어쩔 수 없이 두 문화의 융합에서 나오는 요소들이다. 내가 굳이 주장하지 않아도 작품에서 한국적인 면이 드러나는 것 같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