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작가 릴레이 인터뷰]<3>‘무규칙 여행기’의 빡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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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1월 12일 16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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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내려와 폐가가 즐비한 마을 입구에 도착하자 사나운 개 한마리가 일행의 골목을 막아섰다. 목줄도 풀려 있었다.

'으르르….'

개는 일행에게 틈을 주지 않고 바로 달려들었다.

건장한 남자 셋은 그때부터 개를 피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나는 따라오지 않겠지' 각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찢어졌다.

남자들은 달리는 속도가 느려질까봐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헤어질 때와는 다르게 '틀림없이 개가 나를 쫓아오고 있을 거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빡세'(본명 박민호·31)는 밭으로 뛰어내렸고, 종명형은 산으로, 준호형은 골목으로 달렸다.

"꺅!"

순간 비명소리가 들렸다.

준호형이 골목길 모퉁이를 돌아 달리다가 속도를 줄이기 못하고 그만 땅바닥에 넘어졌고, 이 비명소리에 개도 놀라 도망쳤다.

그제야 안심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던 일행은 "개소주를 만들어 버릴까 보다" 개를 향해 한바탕 욕을 퍼부었다. 하지만 상대가 개인지라 아무리 개XX, 개OO 라고 욕을 해도 왠지 욕 같이 들리지 않는다.

일탈 종합 선물세트, '무규칙 여행기'

인터넷에서 인기리에 연재중인 '무규칙 여행기'. 사진과 카툰으로 구성한 '사진 반, 만화 반'인 이 여행기는 제목대로 규칙이 없다.

계획을 세우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이 있는 것도 아니다. 만화 첫 장면에는 언제나 "폐가체험이나 갈까", "뭐하냐, 용문사 갈래?"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 오고 작가 빡세는 무작정 길을 떠난다.

허름한 여관에서 옆방의 '작업'하는 소리 들으며 잠 못 이루고, 우연히 들어간 식당에서 맛있게 밥을 먹고, 길거리에 만난 아저씨의 술주정을 들어주는 등 여행에서 겪은 사연 하나 하나는 사진과 카툰으로 재생산된다.

별 생각 없이 여행을 떠나고 개에 쫓기고 도둑으로 오해받고 여행 중 만난 미녀에게 작업 거는, 한마디로 빡세의 무규칙 여행기는 '일탈 종합 선물 세트'다.

독자들은 대부분 감히 일탈을 꿈꾸지 못하는 직장인이나 학생. 빡세를 통해 대리 일탈을 경험하며 열광한다.

2005년 연재를 시작한 '무규칙 여행기'는 그동안 '풀빵닷컴', '야후' 등에서 시즌2까지 연재됐으면 현재는 '엔크린 닷컴'에 시즌3이 연재중이다.

'무규칙 여행기'로 이름이 알려진 작가가 되기까지 빡세의 인생도 '무규칙'이었다.

맞으면서 배운 미술

"공부에 전혀 취미가 없었어요."

빡세는 인천의 한 공업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토목 관련 기술을 배워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 취업을 하는 게 목표였다.

그런데 인천 W공고에는 특이하게도 미술반이 있었다.

"정말 웃기게도 공고에 미술부가 있는 것이었어요."

평소 만화 그리기를 즐겨했던 빡세는 미술반에 가입했다. 여백과 선, 색이 이뤄내는 미(美)를 추구하는 미술인들의 모임인 줄 알았던 미술반은 그러나 아름답지 않았다.

고학년이 되기 전까지 매일 집합에 얼차려, 구타….

빡세는 "이젤이 흉기라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고 했다.

맞을 때는 아팠지만 그때 배운 미술은 그의 인생을 바꿔 놨다.

W공고에서 유일하게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이 미술반 학생들이었고, 빡세도 전통에 따라 계원조형예술대학 가구 디자인학과에 진학했다.

군 복무를 마치고 2002년 2월 대학을 졸업한 뒤 그는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에게 직장은 '돈'이었다.

트럭운전을 하시던 아버지의 벌이는 시원치 않았고, 어머니는 바느질로 살림을 보탰다.

대학 진학을 위해 미술학원에 다녀야 했을 때도 그는 돈이 없었다. 허름한 동네 지하 1층 화실에 등록을 하면서 원장이 보는 앞에서 그림을 그리고 "화실 청소를 하겠다"고 말했다.

돈에 한이 맺힌 그에게 게임회사는 좋은 직장이었다. 캐릭터 디자인을 하던 그는 더 좋은 조건을 찾아 이직을 거듭하면서 마지막에는 20대 신입사원으로서는 꽤 괜찮은 액수인 4000만원을 연봉으로 받았다.

돈을 쫓던 그는 그러나 돈에게 배신당한다.

그는 더 큰 수입을 올리기 위해 디자인 외주 제작사를 차려 독립했다. 그러나 고객사들이 잇달아 도산하는 바람에 회사를 말끔하게 말아먹었다.

없는 집안에 그동안 모은 돈이 전부였던 그에게 남은 것은 만화가가 되겠다는 꿈과 자신의 성실성을 알아주지 않는 사회에 대한 배신감, 그리고 1000만원의 빚이었다. 그의 나이 28세였다.

그는 머리를 비우기 위해 무작정 해남 땅끝 마을로 여행을 떠났다. "그냥 내가 가 본 적 없는 가장 남쪽 끝으로 가고 싶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저주받은 20대를 증오했다.

"난 뭐냐! 있는 집 아이들처럼 20대 낭만이란 건 느껴본 적도 없다! 돈이 너무 무서워서 직장 그만둘 생각도 못했다. 하다못해 여행 한 번…."

그러다가 말문이 막혔다.

여행. 여행이었다.

그는 그길로 '여행 만화가'가 되겠다고 뜬금없이 결심하고 직장생활 틈틈이 작품을 만들어 연재하던 '풀빵닷컴'에 무규칙 여행기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월 80'

풀빵 닷컴에 연재 중이던 성인용 만화 '등급보류'와 새로 연재를 시작한 '무규칙 여행기'로 그가 번 돈은 월 80만원이었다.

연봉 4000만원의 캐릭터 디자이너 생활에 익숙했던 그에게 '월 80'은 고통이었다.

힘들 때 마다 그는 무작정 길을 떠났다. 그가 길을 떠나는 횟수가 잦아지면서 인터넷 한 구석에서 조그만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이미 그의 이름이 알려진 뒤였다.

"덕분에 고달픈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는 직장인 학생들의 메일이 쇄도했고 우연히 부산 식당에서 만나 그를 알아본 독자는 그에게 소주 한 잔을 권했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어느 순간 통장에는 안정된 생활이 가능한 액수가 꾸준히 입금되고 있었다.

뒷바라지 제대로 해주지 못해 늘 미안해하던 아버지에게 "아버지, 저 이제 유명 작가에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됐다는 기쁨도 덤으로 따라왔다. 부모님은 대견함과 미안함이 섞인 알듯 말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기쁨은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슬픈 개그맨'

올해 여름. 아버지가 폐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의사는 "앞으로 길어야 6개월"이라고 했다. 7월이었다.

빡세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침을 삼키며 눈물을 참아야했다.

'무규칙'하게 성장해 '무규칙'하게 미술을 배웠으며 '무규칙'하게 직업을 갖고 '무규칙'을 무기로 자리 잡은 그였지만 아버지에 대한 마음은 무규칙하지 않았다.

"여행을 하다보면,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을 자주 맞이해요. 인생도 그런 것 같습니다."

병원을 나서면서 그는 다시 여행길에 올랐다.

아버지 생각으로 머리가 텅 빈 상태에서 무작정 발걸음을 옮긴 곳은 이번엔 군산이었다.

무규칙 여행기 시즌2 마지막 회인 93회 군산편의 등장인물은 그 혼자다.

은적사에서 모닝커피를 마시고, 밥도둑 게장을 맛있게 먹는 내용의 이 작품에서 아버지를 생각하며 여관방에서 통곡한 내용은 빠져있다.

"개그맨은 슬퍼도 무대에서 울면 안 되잖아요."

'우리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다. 갈까? 말까? 재미있을까? 재미없을까? 똥일지 된장일지 모르는 여행에 고민을 거듭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확신이 없어 찍어볼 엄두도 내지 못한다. 똥이면 정말 큰일이니까.'

빡세의 작품 마지막 칸을 장식한 구절이다. 그는 독자들에게 '떠나보라'고 독려한다.

'큰 맘 먹고 떠난 여행길에선 혼자라, 심심하고 불안하고 재미없고 볼 것도 없는 여행이 될 수도 있고 혹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거나 일상의 스트레스와 압박에서 벗어나 새로운 지식이나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는 여행이 될 수도 있으나 이는 모두 여행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것.'

그는 지금 아버지와 여행을 떠났다. 6개월 여정. 그는 그러나 믿는다. 여정은 훨씬 길어질 것이라고. 사람 일은 '무규칙' 하니까.

글/사진=나성엽 기자 cp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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