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크엔드 카페]절도범이 되살려준 ‘가족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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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0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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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수상한 경찰’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자신을 경기 일산경찰서 형사라고 소개한 그는 다짜고짜 “휴대전화 잃어버리지 않았냐”고 물었습니다. 요즘 세상에 휴대전화 한두 번쯤 잃어버리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두 달 전 택시에 두고 내린 휴대전화가 생각나긴 했지만, 저는 ‘보이스피싱 신종 수법인가 보다’ 생각하며 바짝 긴장하고 예의 없이 응대했었죠.

하지만 결론을 말하면 그는 진짜 형사였고 13개월 전 도난당한 제 휴대전화를 찾아주려던 것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대리 운전사를 사칭한 절도범에게 현금과 휴대전화, 가방, 지갑 등을 털렸습니다. 가짜 대리 운전사에게 차를 맡기고 술에 취해 뒷좌석에서 자고 있었는데 그 사이 죄다 가져간 것이죠. 경찰이 그 절도범을 잡고 보니 똑같은 수법으로 당한 피해자가 120명에 이르고 피해 금액도 2억 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제 사례도 TV뉴스에 보도되는 등 ‘영광’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1년도 더 지나 되찾은 휴대전화는 방치된 티가 역력했습니다. 경찰로부터 때 낀 구식 휴대전화를 건네받는 순간 “이걸 가져가봐야 쓸 데도 없는데…. 가방이나 지갑, 현금을 되찾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새 휴대전화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애물단지에 불과한 것이죠. 또 겨우 이걸 돌려주기 위해 서울에서 바쁜 직장인을 일산까지 불렀나 하는 생각이 들어 짜증도 났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빌려온 충전기에 연결해 휴대전화 전원을 켜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 휴대전화를 구입했던 2007년 어느 무렵부터 도난당했던 2008년 9월까지 휴대전화로만 찍어뒀던 우리 가족의 얼굴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아이가 14개월이 될 때까지 성장과정과 그 속에서 행복해 하는 아내의 표정이 있었습니다. 휴대전화를 잃어버리면서 포기했던, 그리고 자연스럽게 머릿속에서도 사라졌던 장면들입니다. 집에 잘 보관돼 있는 앨범 속 사진을 볼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입니다. 집 나간 아이가 돌아온 느낌이 이런 걸까요.

짜증은 이미 감동으로 바뀌었습니다. 새삼스럽게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느낍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절도범이 찾아준 감동’이죠. 그렇다고 절도범이 잘했다거나 휴대전화를 잃어버리자는 얘기는 아닙니다. 운 좋게 휴대전화를 찾았지만 찾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으니까요. 그러니 휴대전화도 잃고 게다가 소중한 기억마저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면 5분 시간을 내 사진을 백업해야겠다는 생각을 ‘또’ 합니다.

김기용 산업부 기자 k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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