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자 “가수 인생 마침표 찍는 심정으로 불렀어요”

  • 입력 2009년 2월 10일 02시 59분


데뷔 50년 기념앨범 ‘세상과 함께 부른 나의 노래 101곡’낸 이미자

《나 이제 노을 길 밟으며

나 홀로 걷다가 뒤돌아보니

인생길 구비마다 그리움만 고였어라

외롭고 고달픈 인생길이었지만

쓰라린 아픔 속에서도 산새는 울고

추운 겨울 눈밭 속에서도

동백꽃은 피었어라.

― 신곡 ‘내 삶의 이유 있음은’ 중에서》

이미자(李美子).

수식어도 필요 없다. 그는 한국 가요사(史) 자체다. 1959년 ‘열아홉 순정’으로 데뷔한 이래 발표한 앨범만 500여 장. 게다가 그 역사는 현재진행형이다. 2006년 한국 갤럽에서 조사한 ‘한국인이 좋아하는 가요 100’에 1964년 발표한 ‘동백아가씨’가 여전히 2위에 올라 있다(1위는 장윤정의 ‘어머나’).

그가 올해 가수생활 50주년을 맞아 4월 2∼4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기념공연을 한다. 이에 앞서 9일 기념 앨범 ‘세상과 함께 부른 나의 노래 101곡’ 발매를 앞두고 6일 오전 서울 서초구 반포동 자택에서 그를 만났다.

○ “다시 없을 기념앨범의 마지막”

1시간 반가량 진행된 인터뷰 동안 그는 집에서 입던 스웨터 차림에도 기품이 넘쳤다. 한참 아래 연배의 기자를 대하면서도 허리를 세운 채 한 번도 소파에 기대지 않았다. 두 손은 무릎 위에 모은 채 목소리도 내내 차분했다. 그런 ‘꼿꼿함’이 50년 세월 정상을 지키는 원동력이 됐을까. 하지만 정작 본인은 “이런 날이 와 나도 놀랍다”고 말했다.

“50주년 기념은 2년 전만 해도 생각도 안 했습니다. 사실 45주년 공연이 마지막 결산이라 생각했거든요. 근데 여전히 지방 팬들은 공연을 못 봐서 아쉽다는 분이 많았어요. 줄곧 전국공연을 해왔지만 여건상 큰 도시 위주였으니까…. ‘빚’을 갚는단 심정으로 10년을 보냈는데 벌써 50주년이 된 겁니다. 다 팬들이 성원하고 용기를 주신 덕분입니다.”

이 씨는 이번 50주년이 “기념보다 ‘마무리’라는 느낌이 강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101곡이 든 기념앨범도 제작했다. 본인의 히트곡 70곡과 1920∼40년대 전통가요 30곡, 여기에 신곡 ‘내 삶의 이유 있음은’을 담아 101곡을 만들었다. 그는 앨범을 “다시는 없을, 이미자 노래 인생의 총결산”이라 불렀다.

“다시는 이런 (기념앨범이나 공연 같은) 자린 안 만들 생각입니다. 노래야 계속하겠지만, 하나의 마침표를 찍는 심정이에요. 아직은 목소리가 녹음할 자신이 있을 때 해두자는 요량으로 1년 넘게 공을 들였습니다. 제 노래 70곡과 옛 노래 30곡, 신곡 1곡을 담았습니다. 신곡 ‘내 삶의 이유 있음은’은 김소엽 시인께서 노랫말을 썼습니다. 딱 제 인생 이야기라 녹음하면서도 여러 차례 눈시울을 붉혔죠.”

이번 앨범에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은 1920∼40년대 전통가요 30곡. 평생 2000여 곡의 노래를 취입하고 히트곡만 쳐도 400곡이 넘는 그가 왜 굳이 남의 노래를 불렀을까. 이 씨는 이를 ‘책임감’으로 설명했다.

“물론 제 노래로도 베스트앨범은 가능하죠. 하지만 1920∼40년대 노래들은 지금 자료가 제대로 남아 있질 않습니다. 우리 세대가 지나도 노래야 전해질 수 있겠지만, 당시 ‘전통’ 창법은 사라진단 소리죠. 그게 안타까웠습니다. 그래도 반백 년 노래로 살아온 사람인데 모른 체할 수 있습니까. 또한 후배들에게 ‘정석’을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스포츠동아 박영욱 기자

○ “요즘 노래 ‘흥’ 넘쳐 ‘정’ 부족… 기본 잊지말길” 충고도

시종일관 차분하던 그의 말에서 문득 ‘전통’과 ‘정석’에 슬쩍 힘이 가해졌다. 반백 년 정상의 가수로 살아온 그의 눈에 요즘 가요계와 후배들은 흡족하지 않을 수 있을 터. 이 씨는 “후대는 그들 나름의 방식이 있는데 훈수 둘 생각은 없다”고 손사래를 치다 “다만…”이라며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안타까운 점이 없진 않죠. 성인가요들이 너무 흥 위주로 흘러가며 말초적인 가사가 등장하는 건 속상합니다. 노래에는 흥도 필요하지만, ‘정’도 중요하거든요. 결국 노래는 가수가 청중에게 마음의 정을 전달하는 건데…. 오히려 요즘 10, 20대 노래 중에 그런 전달력을 가진 곡들이 눈에 띄더군요. 그 역시 시대의 반영이겠지만, 한쪽으로 몰리진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연예계 후배들에게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라”는 덕담도 잊지 않았다. 이 씨는 “평생 외롭고 예민한 직업이라 나 역시 죽고 싶단 생각이 든 적도 있다”면서 “몇십 년 만에 내 노래들이 금지곡에서 풀렸듯 참고 견디면 좋은 날은 꼭 온다”고 말했다.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죠. 아이들도 키워 보니 요즘 세대는 ‘인내’에 익숙하지 않단 느낌이 들어요. 우리 세대는 6·25전쟁을 비롯해 갖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걸 내세우잔 게 아니라, 어떤 일도 견딜 수 있단 믿음이 중요합니다. 기본과 정석을 잊지 않으면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 세대가 바로 그 증거 아닙니까.”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 이미자가 뽑은 ‘내 노래 Best 5’

열아홉 순정-동백아가씨-섬마을 선생님-기러기아빠-내 삶의 이유 있음은

이미자 씨가 노래 인생 50년 동안 레코드로 녹음한 노래만 2000여 곡에 이른다. 이 중 히트곡만 어림잡아도 400곡이 넘는다. 그런 그에게 ‘이미자 노래 인생의 베스트 5곡’을 가려 달라는 부탁은 가당찮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씨는 예의 ‘온화한’ 미소로 조목조목 뽑아줬다.

▽열아홉 순정=말할 것도 없이, 이미자를 세상에 알린 데뷔 곡. 1958년 HLKZ 방송국에서 열린 아마추어 노래자랑 프로그램에서 1등 한 나를, 심사위원이던 황문평 선생이 당시 톱 작곡가인 나화랑 선생에게 소개했다. 나 선생은 “노래 몇 해보라”더니 그 자리에서 바로 5곡의 노래를 줬다. 그중 하나가 ‘열아홉 순정’이었다.

▽동백아가씨=이미자가 동백아가씨고, 동백아가씨가 이미자다. 당시 한 순위프로그램에서 35주 동안 1위를 차지했다. 소매상들이 판을 구하려고 웃돈을 얹어주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정확한 집계는 없지만 앨범 판매도 10만 장이 넘었다. 요즘으로 치면 몇백만 장이 팔린 셈이다.

▽섬마을선생님 & 기러기아빠=동백아가씨와 함께 스스로 ‘3대 히트곡’으로 꼽는 노래들. 둘 다 박춘석 선생의 작품이다. 공교롭게 세 곡은 모두 방송금지곡으로 묶였다. 왜색이란 이유를 달았지만, 개인적으론 경쟁 레코드사의 방해가 아니었나 싶다. 재미있는 건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 시절 청와대에서 가장 많이 부른 노래도 이 세 곡이다.

▽내 삶의 이유 있음은=새 노래 홍보가 아니다. 이 노래는 이미자 인생이 그대로 담겨 있다. 녹음을 하면서도 여러 번 눈시울을 붉혔다. 이 노래를 포함해 이번 앨범은 정말 열과 성을 다했다. 노래 구성은 물론이고 마지막 배치까지도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음악은 내 삶의 이유니까.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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