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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9년 1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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켜켜이 쌓인 600년 한눈에
연구센터는 높이 13m의 육조거리 토층을 △17∼20세기(조선 후기∼일제강점기) △14∼17세기(조선 전기∼임진왜란 전후) △14세기 이전으로 나눠 시대별로 3곳(평균 너비 2m, 높이 3∼4m), 총 9곳(면적 86m²)의 토층 단면을 분리했다.
16일 기자가 찾아간 연구센터에서는 토층 복원의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었다. 이 토층은 흙을 다져 만든 조선의 주작대로가 여러 차례 보수된 흔적을 보여 주었다.
육조거리를 보수할 때 섞어 넣은 기와, 자기, 토기, 동물 뼈가 수백 년 전 모습 그대로 묻혀 있었고 시대별로 다양한 유물의 분포, 토층 색깔, 흙의 굵기도 생생했다. 육조거리를 발굴한 한강문화재연구원 박준범 부원장은 “기와와 자기를 흙에 섞어 만든 조선식 도로 축조, 보수 방식의 변천사를 한눈에 보여 준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번에 보존 처리된 토층이 발굴 때 외부로 드러난 단면이 아니라 토층 내부의 숨은 단면이라는 점이다.
연구센터는 토층 바깥면을 딱딱하게 굳힌 뒤 ‘한 꺼풀의 껍질’을 벗겨내 ‘역사의 속살’을 드러냈다. 껍질의 두께는 1cm 이상, 토층 단면당 무게는 평균 70∼80kg에 이른다. 이 ‘무거운 껍질’을 벗겨내기 위해 연구센터는 6차례에 걸쳐 토층 표면을 굳혔다. 거즈를 올린 뒤 경화용 합성수지를 바르고 1, 2일 뒤 토층이 굳으면 그 위에 거즈를 올리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분리될 수 있는 토층의 두께를 넓혀 나간 것.
위광철 연구센터장은 “특별한 유물이 없을 경우 한두 번 굳히면 되지만 육조거리에는 수많은 유물이 포함돼 여러 차례 반복하지 않으면 유물이 토층에 묻힌 형태를 유지하면서 토층을 분리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굳은 토층을 무너지지 않게 하거나 내부의 유물이 부서지지 않게 분리하는 작업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일이었다. 600년 역사가 순식간에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표면 경화처리(코팅)도 토층 원래의 색을 살리기 위해 여러 차례 시행착오를 거쳤다. 이렇게 해서 분리된 ‘9장의 타임캡슐’은 맞춤 제작된 별도의 틀에 실려 연구센터로 옮겨졌다.
연구원들은 토층에서 흙이 떨어지거나 미세한 균열이 생긴 부분을 찾아낸 뒤 같은 층 위의 다른 토층에서 채취한 같은 굵기와 색을 지닌 흙을 채워 넣었다. 이어 2차 표면 경화처리가 끝나면 보존 처리가 끝난다.
위 센터장은 “서울 도심에서 유적이 잇달아 발굴되면서 개발과 보존의 합의가 중요해졌다”며 “토층 전사(轉寫)가 서로 상생하는 방법의 하나로 주목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산=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