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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8년 12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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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1년 12월 5일(이하 음력) 사간원 헌납(獻納·정오품 벼슬) 윤경교가 현종에게 상소문을 올렸다. 기근과 전염병으로 2년 동안 죽은 백성이 100만 명에 이른다는 보고였다. 1670년(경술년)과 1671년(신해년) 두 해에 걸쳐 발생한 ‘경신대기근’은 조선 시대 최악의 기근으로 꼽힌다.
17세기는 세계적으로 이상저온 현상이 나타나 ‘소빙기(小氷期)’로 불린다. 저자는 당시 자연재해가 불러온 대기근으로 조선 사회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현종실록’과 ‘현종개수실록’ ‘승정원일기’ 등을 토대로 추적했다.
시작은 냉해(冷害)였다. 봄 가뭄이 극심하던 1670년 2월 26일 서울 한복판에 눈이 내린 것을 시작으로 가을까지 전국에 우박, 서리, 냉우(冷雨)가 이어졌다. 물난리와 강풍 피해도 겹쳤다. 8, 9, 10월에는 폭풍을 동반한 큰비가 내렸다. 5월 시작된 메뚜기와 벌레에 의한 농작물 피해는 다음 해까지 이어졌다. 1670년 1월 충청도에서 처음 보고된 전염병도 확산됐다. 우역(牛疫)은 대기근 2년 동안 4만여 마리의 소를 앗아갔다.
이 같은 대기근으로 사람들은 고향을 떠나 진휼(賑恤·흉년 때 빈민구제제도)과 의료제도가 상대적으로 잘 정비된 서울로 몰려들었다. 15세기 경상도에 이어 인구 2위였던 평안도는 당시 심한 추위로 인구가 줄어 17세기를 지나며 4위가 됐다. 조정은 진휼 비용과 세금 탕감에 따른 국가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해 재물을 받고 신분과 관직을 파는 납속을 적극 활용해 양반층이 증가했다.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