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79년 김형욱 前중정부장 실종

  • 입력 2008년 10월 7일 03시 00분


오후 7시 어둠이 내린 프랑스 파리 시내. ‘르 그랑 세르클’ 카지노에서 중년의 남자가 밖으로 나왔다.

건장한 청년 두 명이 이 남자에게 다가가 대기하고 있던 고급 승용차에 태웠다. 차는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이 중년의 남자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전 중앙정보부장 ‘김형욱 실종 미스터리’는 1979년 10월 7일 이렇게 시작됐다.

프랑스 정부가 수사에 나섰지만 밝혀낸 것은 김 씨가 실종되기 6일 전 파리 리츠호텔에 묵다 ‘키 큰 동양인’과 함께 호텔을 옮긴 뒤 카지노에 갔다 실종됐다는 것이 전부였다.

당시 우리 정부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우리 정부와는 무관한 사건이다”는 말로 일관했다.

1963년부터 1969년까지 6년 3개월 동안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 씨는 유신이 선포된 다음 해 학위를 받는다며 대만으로 출국했다.

대만을 거쳐 미국에 도착한 김 씨는 미국에 망명했고, 1977년 박동선 로비 사건 때는 미국 의회의 청문회에 나가 박정희 대통령과 정권에 불리한 증언을 했다.

김 씨는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회고록을 출판했다.

유신 정권은 김 씨를 귀국시키기 위해 회유와 협박 등 모든 수단을 동원했으나 김 씨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김 씨가 실종된 지 5년이 흐른 1984년 김 씨의 가족은 법원으로부터 실종사망 선고를 받았다.

유신 정권에 의해 살해됐다는 추측만 무성한 채 잊혀져 가던 김 씨 실종 미스터리는 2005년 4월 또다시 세인의 주목을 끌었다.

중앙정보부 특수공작원 출신이라고 자처한 사람이 김 씨를 납치해 살해한 것은 자신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는 한 주간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김 씨를 납치한 뒤 파리 교외 양계장 분쇄기로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한 달 뒤 국가정보원의 과거사건을 조사한 진실위원회도 김 씨 실종 사건에 대해 중간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진실위는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지시를 받은 이상열 프랑스 주재 공사가 중앙정보부 요원들을 시켜 김 씨를 살해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진실위는 김 씨를 직접 살해한 것은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돈을 주기로 하고 고용한 동유럽인 2명으로 파리 교외 숲에서 소음권총으로 김 씨의 머리에 7발의 총알을 쏴 죽였다고 발표했다. 김 씨의 시신은 두껍게 쌓인 낙엽으로 덮었다고 밝혔다.

결국 김 씨 실종 미스터리는 중앙정보부의 지휘 아래 진행됐다는 것만 확인됐을 뿐 살해 방법 등은 아직도 미궁 속에 남아있다.

이현두 기자 ruch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