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41년 日, 하와이 정찰 훈령

  • 입력 2008년 9월 24일 03시 00분


미국의 비행기 생산력, 자동차 생산력, 공업 노동력은 일본의 5배, 450배, 5배였다. 자원 역시 미국이 철강 20배, 석탄 10배, 전력 6배, 알루미늄은 6배나 많았다.

두 나라의 국력 차는 이처럼 매우 컸기 때문에 태평양전쟁은 약자가 강자에게 도전한 역사적으로도 희귀한 케이스다.(이창휘, ‘우리의 눈으로 본 일본제국 흥망사’)

일본은 1940년부터 인도차이나 지역을 점령하고 미국 보호령인 필리핀을 위협했다. 미국은 자국 내 일본 자산을 몰수하고 일본 선박이 파나마 운하를 이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1941년 9월 초에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이 계속해서 동남아와 남태평양을 침공하면 전쟁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육군대신과 내무대신을 겸하던 도조 히데키는 이를 최후통첩으로 보고 전쟁을 결심했다. 국력 차를 감안해 장기전보다는 속전속결 방침을 세우고 진주만을 공격 대상으로 골랐다.

하와이 주재 일본 영사인 기타 나가이는 같은 해 9월 24일 본국으로부터 은밀한 명령을 받는다. 진주만을 5개 구역으로 나누고, 구역마다 전함이 얼마나 있는지 파악하라는 지시.

일본은 이 전문을 미국이 포착한 것을 알지 못한 채 전쟁을 준비했지만 미국도 문제가 있었다.

미군 통신부대는 일본과 하와이를 오간 암호 형태의 전문을 해독하려고 워싱턴으로 보냈다.

하와이와 미국 본토를 연결하는 항공편이 많지 않아서 선박을 이용하는 바람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 워싱턴에서의 해독 작업 역시 늦어졌다. 담당 인력이 부족하고 다른 업무에 밀렸다.

미국은 10월 중순에 암호를 완전히 풀었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정보라고 무시해 버렸다.

하와이 시간으로 12월 7일 오전 7시 49분(워싱턴 시간 오후 1시 19분)에 일본 전투기가 진주만 상공을 새카맣게 덮었다.

민간인과 군인 등 3500여 명이 숨지거나 다치고 함정 18척이 피해를 본 뒤에야 미국은 하와이발 정보의 중요성을 알게 됐다.

송상근 기자 songm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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