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뉴 트렌드]<2>개념사 연구

  • 입력 2008년 3월 12일 02시 59분


“20세기 대한민국은 근대 이후 전통의 급속한 해체, 제국주의 지배, 이념 갈등, 분단, 산업화, 민주화를 숨 가쁘게 경험한 독특한 역사의 산물이다. 이 소용돌이 속에서 학문적 개념이 해체, 형성, 변화해 온 맥락과 역사를 알지 못한 채 한국 인문학의 도약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개념사 연구’ 없이는 인문학의 새로운 지평은 불가능한 것이다.”

역사학 철학 문학 종교학 정치학 사회학 등 인문학 분야에서 학문적 개념의 맥락과 역사를 고찰하는 연구가 활발하다. 개념사 연구는 근대기 일본과 중국 등을 통해 수입된 서구의 개념을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인문학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연구가 불가능하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2000년대 이후 시작된 개념사 연구는 개별 연구자 수준에 머물다 최근 한림대 한림과학원을 중심으로 공동 연구가 이뤄지고 있다. 박상섭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등 17명이 외교 시민 제국 문학 문화 역사를 비롯한 여러 방면에서 학문적 개념의 역사를 집필하기 시작했으며 그 성과를 담아 2010년까지 ‘한국 개념사 총서’(총 18권)를 발간할 계획이다.

19세기에 도입된 사회과학 개념의 역사를 연구해온 하영선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도 ‘한국의 개념사 연구 모임’을 만들어 상반기 중 성과물을 책으로 낼 예정. ‘한국 개념사 연구 모임’과 동북아역사재단, 서울대 국제문제연구소는 올해 9월 서울에서 세계적인 개념사 연구 학회인 정치사회개념사학회(HPSCG)의 총회를 개최하는 등 국내에서 개념사 연구는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 서구 중심주의의 극복

민족은 근대에 형성된 개념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박찬승 한양대 사학과 교수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민족은 근대의 산물만은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다른 민족과 구별하는 의미에서 ‘족류(族類)’라는 개념이 이미 쓰였다. 동포라는 개념도 혈연적 유대감을 강조하는 뜻으로 등장한다. 이 개념은 1890년대 이후 독립신문이 ‘전국의 동포형제’란 표현을 쓰면서 역사의 주체란 뜻으로 확대됐다는 게 박 교수의 분석. 민족이라는 용어는 20세기 초에 등장하지만 근대 이전 이미 비슷한 개념이 실체로 자리 잡고 있었던 셈이다. 박 교수는 “그동안 민족 실체를 둘러싼 논란이 서구적 기준에 의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지적한다.

박명규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시민의 개념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한다. 보통 시민 개념은 법적 정치적 권리를 지닌 주체란 뜻. 이는 서구로부터 수입된 개념이다.

그러나 근대 이전에 이미 시민이란 개념이 쓰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조선시대 ‘시민’은 한양의 시전상인을 뜻했다.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시전 체제가 무너지고 상업의 자유가 확대되면서 시민은 지방 상인을 뜻하는 말로 변했다.

박명규 교수는 “이 연구는 서구적 개념이 어떻게 번역돼야 하는지에만 초점을 맞추고 정작 우리 시민 개념의 기원에 대한 논의가 부족한 데 대한 자성”이라고 말했다.

최원식 인하대 국문과 교수는 19세기 서구의 ‘리터러처(literature)’가 번역된 ‘문학’은 근대 이전 이미 같은 단어로 있었지만 그 의미는 달랐다고 말한다.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 문학은 광범한 학문을 바탕으로 글을 잘 쓰는 것을 뜻했다. 전문화된 창작가가 아니라 지식인에 가까웠다는 것. 최 교수는 “한국 문인이 일제강점기와 독재정권시대에 당대를 대표한 지식인으로 활약한 것은 근대 이후에도 전통 문학 개념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문예사조인 자연주의에 대한 새로운 시각도 흥미롭다. 주인공 내면의 번민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는 한국 최초의 자연주의 소설. 자연주의는 ‘내추럴리즘(naturalism)’을 번역한 것이지만 내추럴리즘은 본래 인간이 환경과 유전에 의해 결정되는 과학주의 정신을 표방하면서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인간 상태를 그려낸 작품 경향이다.

김지영 한림과학원 연구교수는 “19세기 말 서구 문예사조가 일본에 수입되면서 일본인들이 ‘내추럴(natural)’을 ‘자연(自然)’으로 번역해 부끄럽고 저속한 심리라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일본 문학 경향인 사소설을 만들어냈고 이 경향이 자연주의란 이름으로 한국에 유입돼 한국만의 독특한 사조가 생겨났다”고 말했다.

○ 한중일, 서구 개념 수용 제각각

전문가들은 개념사 연구가 한중일 개념의 비교를 통해 공통된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동아시아 공동체의 지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은 근대기에 서구 개념을 급격히 수용하면서 혼란을 겪었고 개념의 변이 과정도 각각 달라 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태다.

‘네이션(nation·국가 또는 민족)’의 개념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차이가 대표적인 예. 김윤희(한국사) 한림과학원 연구교수에 따르면 중국은 1911년 신해혁명 이후 다민족 국가 건설을 위한 정치운동을 펼치면서 ‘내셔널리즘(nationalism)’을 국가주의로 받아들였다.

일본은 제국주의 국가로 발전하면서 혈연보다 문화적 공동체를 강조해 ‘내셔널리즘’을 국가주의로 번역했다. 혈연, 외세 저항의 상징으로 민족주의를 선택한 한국과 쓰임새가 다른 것이다. 개념사 연구를 통해 이 같은 차이를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전문가들은 개념사 연구가 우리 학문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나아가 세계 수준으로 끌어 올리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김용구 한림과학원장은 “서구의 개념이 동아시아에서 어떻게 변했는지 고찰하는 우리식의 개념사 연구는 서구 학자들에게도 큰 관심사”라며 “우리 학문이 세계 학계에 통용될 수 있는 지적 바탕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 외국의 개념사 연구는

“문화가 통합돼야 진짜 통합”

유럽 ‘어휘 프로젝트’ 진행중

개념사 연구를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성과는 독일 사학자 라인하르트 코젤레크(1923∼2006)의 ‘역사의 기본개념’이다. 모두 8권인 이 저작은 권당 분량이 1000쪽에 이른다. 1972년 책을 펴내기 시작해 완간까지 25년이 걸렸다.

‘역사의 기본개념’에는 109명의 분야별 전문가가 참여해 민족, 국가, 혁명, 계급 등 정치 사회 개념들의 기원과 변화 과정을 분석했다. 항목별 분량이 평균 50쪽에 이르며 ‘혁명·반란·봉기·시민전쟁’ 항목은 136쪽 분량에 주석만 778개에 이를 정도.

유럽은 프랑스 혁명이라는 사회 변혁을 기점으로 여러 학문 분야에서 신조어가 생겨났고 이 개념들이 근대의 기초를 마련했다. ‘역사의 기본개념’은 이 근대적인 학문 개념과 사유구조의 전환에 초점을 맞췄다.

독일의 개념사 연구는 백과사전식 편제를 취했다. 이 때문에 개별 개념의 역사에 한정돼 개념 사이를 가로지르는 종합적인 분석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있다.

영국은 중세 후기∼근대 초기의 공화주의, 자유주의, 인문주의 등 개념 변화 연구에 주력하고 있다. 프랑스에서도 개념의 변화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유럽의 개념사 연구는 최근 유럽 학문 개념의 공통분모를 찾자는 ‘유럽 어휘 프로젝트(European Lexicon Project)’로 거듭나고 있다. 독일 영국 네덜란드 핀란드 헝가리 등 여러 나라의 연구자들이 참여한 이 프로젝트는 주요 개념들이 지역이나 국가에 따라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이들은 유럽의 진정한 통합은 문화적 통합에 기초해야 한다며 학문과 일상 개념의 차이를 연구하고 있다.

유럽 이외의 국가 가운데 개념사 연구가 두드러진 곳은 브라질. 브라질의 개념사 연구는 토착민의 삶과 연관된 전통 개념이 식민 통치를 겪으며 주류로 성장하지 못하고 억압된 과정과 서구 개념이 브라질 현실과 맞지 않는 점 등을 조명하고 있다.

2004년 비서구권 국가 가운데 처음으로 정치사회개념사학회(HPSCG) 총회를 유치했을 만큼 개념사에 대한 관심이 크다.

중국 상하이 사회과학원은 현재 18세기 중엽 이후 신조어의 생성과 변화 과정을 연구 중이고 일본에선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개념 20개를 분석한 ‘한 단어의 사전’(2001년)이 나온 바 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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