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의 지평선]떠나가는 항일투사들…예우 소홀함 없었는지 죄스럽다

  • 입력 2008년 2월 26일 03시 01분


고은 시인이 태극 문양의 청색과 홍색을 따서 그린 그림. 고은 시인은 3·1절을 앞두고 “독립투사들의 업적으로 지금 같은 ‘일상의 시대’를 이룰 수 있었다”고 말했다.
고은 시인이 태극 문양의 청색과 홍색을 따서 그린 그림. 고은 시인은 3·1절을 앞두고 “독립투사들의 업적으로 지금 같은 ‘일상의 시대’를 이룰 수 있었다”고 말했다.
양쯔 강 기슭의 노자 가라사대, 꽃에 머물지 말라(그렇다면 한 번 펄쩍 뛰어 열매에 머물라고?).

싫어.

나는 방금 우주의 한 가장자리 휘젓고 나비 암수 한 쌍과 더불어 꽃 언저리 얼쩡거릴래.

다시 노자 가라사대, 저 건넛마을 허 첨지네 집 근방까지 굳이 가지 말거라.

저 건넛마을 오 서방네 닭 우는 소리도 아예 듣지 말라(그렇다면 오로지 이 고샅에서만 처박혀 살라고?).

싫어.

나는 간밤 온 힘을 다하여 드높이 날아간 기러기 하늘에 내 허름한 뒷날개나마 실컷 펴 훨훨훨 날아갈래. 가서는 오고, 와서는 또 갈래.

어디 여기만이 천 겁 내내 내 조국이런가. 살다 보니 내 고향 내 조국 내 연합지역들. 수수천만이더군. 나 헤픈 들병장수 아녀. 나는 나의 무한 복수(複數) 그것이야.

시인 이동순은 어머니를 모르고 자랐다. 그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는 세상을 그만두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의 그렁그렁한 사랑도 듬뿍 받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항일운동의 바깥에 더 많이 기울어졌기 때문이다.

빼앗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이렇듯이 결손이 많은 삶을 살기 십상이다.

몇 해 전 나는 보훈병원으로 이강훈을 위문하러 간 적이 있다. 그 단호하던 눈빛도 어느만큼 꺼져 있었다. 다부진 목소리도 누그러져 있었다. ‘나 백 살이나 먹었소’ 하고 누운 채 웃음을 터뜨릴 때 나는 함께 웃을 수 없었다.

이듬해 101세로 세상을 떠났다. 젊은 날의 저항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강건한 심신의 수명이었다. 일찍이 그이가 빈민촌 골방에서 쓴 독립운동사를 나는 서사시 자료로 삼은 적이 있다.

최근에는 항일투사 조문기 타계 소식이 있었다. 1945년 7월 24일 서울 부민관(현재의 서울시의회 본관)에서 박춘금 김동환 등이 황군(皇軍) 필승체제 확립과 내선일체 촉진을 목적으로 대의당(大義黨)을 결성하고 아세아민족분격대회를 개최했다. 그 현장에 청년 조문기 등이 스며들어 다이너마이트 사제폭탄을 터뜨려 아수라장을 만들었다.

조문기 겨레장에 뒤이어 신문들은 애국지사 최상제의 별세를 알리고 있다. 광복군 제1지대 이래 공작반으로 활약한 사람이다. 향년 85세. 이어서 조선독립당 문인갑의 별세였다.

광복 63주년의 2008년이다.

이제 국내외 독립운동의 후기에 해당하는 일제강점기 말기의 애국자들도 얼마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10년 안팎이면 우리는 부고란에서 ‘애국지사 아무개 선생 별세’라는 궂긴 소식을 읽을 수 없을 것이다.

그이들과 함께 활약한 동지 대부분은 요절만이 아닌 전사 옥사 병사들의 혹독한 불운으로 조국의 이름에 그 생을 바친 것이다. 그 가운데서 살아남은 사람이 일장기가 내려진 게양대에 태극기가 올라가 펄럭이는 하늘 밑에서 살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그들의 생존이 겨레의 기상을 표상해 왔다.

그들의 타계 부음을 들을 때마다 그들에 대한 예우나 보훈의 소홀함이 없었는지 새삼 부담을 지니게 된다. 또한 그들의 시대와 다른 일상의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무관심도 흔히 드러나기 마련이다.

어제의 가열한 명분과 오늘의 분망하기 짝이 없는 생활은 자주 동떨어지고 있다.

앞으로는 이런 애국자들의 생사가 종료될 것이다. 그들의 자취는 세월이 갈수록 당대의 절실성이 아닌 설화성으로 기억될 것이다.

마치 고대나 중세의 어떤 지층에 박힌 역사의 단층이 분명코 오늘의 사실이 아닌 것처럼 과거는 시간의 속도를 이길 수 없다. 이런 사실의 다른 쪽에서 인간은 역사로부터 염치없이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이 있어야 한다.

사회는 결코 거룩한 곳이 아니다. 고대 제단인들 중세의 첨탑인들 그 아래에서 정의가 강물처럼 넘쳐흐르지도 않았고 사랑이 파도처럼 철썩대지도 않았다. 어떤 가치는 그 가치의 수사학에 지나지 않았던 것에 솔직하지 않다.

인류가 떠돌기를 멈추고 씨 뿌리며 살게 되자 불가분 사회가 뿌리내렸다.

그곳에 사원과 학교가 먼저 있었을까.

아닐 것이다. 경찰과 감독이 먼저였을 것이다. 고대 8금법도 그것이다. 함무라비 법전도 모세 10계도 그렇다.

오늘 경부고속도로를 달린다. 차에 속력을 더하면 감시카메라가 어김없이 찍어댄다. 벌금이 나올 것이다. 모든 도로는 신호체계로 유지된다. 청신호가 아닐 때 마지못해 서야 하고 적신호가 황신호로 바뀌자마자 벌써 저만치 나아간다.

사회는 이렇게 타율의 질서를 기반으로 되었다. 만약 이런 질서가 없다면 무법천지가 될 수밖에 없다. 아나키즘의 고민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고속도로의 감시카메라를 지나자마자 차는 속력을 내어 달린다. 그런 행위 자체가 교통법규 위반이라 하더라도 아무런 가책이 없다.

생각건대 인간이란 그다지 고상하지 않은 생물이다. 그리하여 사회는 도둑과 경찰, 죄와 벌로 긴장되는 구성물이다.

이런 사실을 알면 알수록 세상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서글픈가.

옛 유교의 규범에 ‘신독(愼獨)’이 있다. 아무도 없을 때 자기 자신에게 엄격할 수 있기를 바라는 뜻일 터. 이런 경지에 미치지 못할지라도, 많은 눈과 입이 있는 사회의 한복판에서라도 자신에게 자그마한 품위를 보태는 몸짓이나마 얼마나 소중한가. 때로는 위선도 선의 이웃 아닌가.

고은 시인·서울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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