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중세를 여행하는 사람들

  • 입력 2008년 1월 19일 03시 03분


◇중세를 여행하는 사람들/아베 긴야 지음·오정환 옮김/336쪽·1만3000원·한길사

중세를 무대로 한 외국 영화를 보면 수많은 엑스트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빵을 굽고, 칼을 벼리고, 술을 파느라 분주하다. 화면의 구석구석으로 눈을 돌려 이들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주인공을 위한 ‘배경 그림’에 지나지 않는 이들에게 눈길을 두는 관객은 많지 않다.

저자는 책에서 이런 엑스트라들을 ‘주연’의 자리로 끌어올렸다. 중세 유럽의 농민, 목욕탕 주인, 제분업자, 푸줏간 주인, 양치기들이 이 책의 주인공이다. 저자는 주목받지 못했던 하층민의 삶을 통해 중세 서양의 풍속사를 상세하게 소개한다.

당시 농민들은 봄에 쟁기질을 할 때 처녀와 입을 맞췄다. 풍작이 될 것이라는 미신 때문이다. 섣달 그믐날 밤 마을의 네거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네거리에 원을 그리고 그 안에서 주문과 함께 죽은 사람의 이름을 외치면 죽은 자가 나타나 새해에 일어날 일을 알려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특정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권리와 의무를 통해 당시의 행정, 사법 체계를 소개하기도 한다. 독일 중세사에 정통한 것으로 인정받는 일본 학자답게 단순한 소개를 넘어 풍속이 생겨난 역사적, 사회적 근원까지 분석한다. 가벼운 이야기로 시작해 깊숙한 이면을 파헤치는 방식이다.

목로주점 주인은 낯선 사람이 숙박하면 촌장에게 보고해야 하는 의무가 있었다. 거동이 수상할 때는 임의로 체포할 수도 있었다. 나루터에서 나루지기를 세 시간 동안 불러도 나루지기가 나타나지 않으면 근처 주막에서 나루지기 앞으로 외상을 긋고 2L까지 와인을 마실 수 있었다.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은 나루지기의 근무 태만을 혼내 주기 위한 것이다.

숲의 나무껍질을 함부로 벗긴 자는 그 나무에 묶고 배에서 창자를 꺼낸 뒤 나무껍질이 살아날 때까지 나무에 말아두는 형벌도 있었다. 숲의 나무가 농촌 생활의 귀중한 자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의 생활 여건에 대한 고찰의 한 부분으로 마을 길이 어떻게 관리됐는지 설명하는 부분이 특히 눈길을 끈다.

“마을의 길은 해마다 생기고 없어지기를 반복했다. 경작지가 매년 달라지는 삼포식(三圃式) 농법 때문이다. 경작지로 향하는 길뿐 아니라 건초를 수집하기 위해 매년 6월에만 열리는 길, 가을의 퇴비길, 겨울의 썰매길, 샘으로 가는 길 등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열렸다.”

중세 법률서를 비롯한 다양한 자료를 통해 당시 풍속을 세세하게 옮겨 놓은 것이 이 책의 장점. 하지만 저자의 묘사가 너무 소소한 탓에 지루하게 느껴지는 대목도 군데군데 눈에 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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