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낙엽의 계절에 꽃망울 터뜨려…놀라워라,야생녹차밭

  • 입력 2007년 11월 9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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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차로 5시간 남짓을 꼬박 달려가야 하는 경남 하동.

물길과 사람이 만나 어우러지는 곳이다.

‘전라도나 경상도/여기저기 이곳저곳/산굽이 돌고 논밭두렁 돌아/헤어지고 만나며/이렇게 시퍼런 그리움으로/…가슴 벅찬 출렁임으로 차오르나니/…저 시퍼런 하동 포구’

시인 김용택의 말처럼 하동 섬진강에선 동(東)과 서(西)의 물길이 만난다.

가수 조영남이 ‘구경 한 번 와보시라’고 흥겹게 외쳤던 하동군 화개면 화개장터에서는 동서의 사람들이 만난다.

이뿐만 아니다. 1023호선 지방도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치솟은 지리산의 봉우리 산비탈 곳곳에 흩어져 자라는 야생 차나무.

가을엔 이 차나무 가지에서 지난해 피었던 꽃의 흔적인 열매와 올해 피어난 꽃이 함께 만난다.

한여름 더위가 가시는 9월 말부터 지리산 발치마저 울긋불긋 단풍이 드는 12월 초순까지 꽃은 피고 지고 또 피어나 자태를 뽐낸다.

녹차하면 새순이 파릇파릇 돋는 봄을 생각하기 마련이다.

아낙네들이 여린 잎을 따는 풍경을 담은 사진은 녹차 밭의 이미지다.

하지만 야생 차나무가 산비탈마다 흐드러진 하동으로 차를 몰아 보자.

달콤하면서 쌉싸름한 가을 녹차의 향취에 젖어도 보고 꽃을 띄운 녹차를 마시는 풍류도 즐길 수 있다. 살아 있는 많은 것들이 소멸로 향해 가는 지금도 새싹을 틔워 내는 푸르른 차나무 밭을 눈에 담으면 삶의 의지와 기운이 돋아난다.

눈 깜짝할 새에 한 해가 스러져 간다는 조바심도, 너무 바삐 살았다는 한탄도, 미움이나 사랑에 안달했던 지난 세월도 부질없이 느껴진다.

이 모든 것은 흘러가야 한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이다. ▶dongA.com에 동영상》


촬영: 박영대 기자

낙엽의 계절에 새순 틔우고 꽃망울 터뜨리는 곳

놀라워라, 야생녹차밭

○ 가을 겨울에 더 눈부신 생명력

녹차는 눈으로, 향으로, 맛으로 즐기는 차다.

70∼80도의 따끈한 물에 말린 녹차 잎을 담그면 사르르 풀리면서 초록으로 살아나는 녹차 잎의 모습은 눈을 즐겁게 한다. 적당히 우러났을 때 찻잔에 따르면 수증기와 함께 200여 가지의 향이 퍼진다. 이때 찻물을 한 모금 머금어 보면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한 맛이 느껴진다. 향으로, 맛으로 즐긴다.

봄의 녹차 밭에선 연초록빛 풍경을 즐길 수 있다. 가을철에는 즐거움의 목록이 늘어난다. 푸른 녹차나무는 단풍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게다가 눈과 코로 녹차 꽃마저 즐길 수 있다.


촬영: 박영대 기자

“녹차 밭의 풍취는 가을을 지나 겨울로 갈수록 더 돋보이는 법입니다.”

화개면에서 3대째 녹차 밭을 가꾸고 차를 만들어 온 우전차 명인 김동곤 씨는 이렇게 말했다. 차나무는 상록수다. 초록이 지쳐 단풍 물이 들 때, 그 단풍마저 지고 산이 헐벗는 겨울이 왔을 때 녹차 밭의 싱그러움은 더 두드러진다.

열매와 꽃이 한 가지에 맺고피기에 ‘실화상봉수(實花相逢樹)’라고 불리는 녹차나무는 식물 생태계의 이단아다. 가지에 달린 꽃을 보는 것도 좋지만 막 터지기 직전의 꽃망울을 따서 찻잔에 띄우면 따뜻한 물에 서서히 봉오리를 벌리는 자태가 빼어나다. 언뜻 매화꽃과 비슷한 향이 나지만 훨씬 은은하다.

녹차나무에는 특이한 점이 또 있다. 봄에 잎이 나서 여름에 짙어지고 가을이면 낙엽으로 떨어지는 여느 나무와 달리 한여름과 겨울을 뺀 봄, 장마철, 가을 등 세 번에 걸쳐 잎을 틔운다. 그때마다 새순을 따서 차로 만들 수 있다. 봄에 따는 차는 시기와 크기에 따라 우전, 세작, 중작, 대작의 이름이 붙여진다. 장마철에 따는 차는 최상급이 아니어서 잎차보다는 티백 형태로 만들어져 유통된다.

가을에 따는 차는 ‘추차(秋茶)’로 불린다. 나무의 뿌리가 깊고 토질의 영양성분이 우수해야 맛이 좋고 부드러운 잎이 나는데, 좋은 추차를 만들 수 있는 곳은 드물다.

추차는 통상 잎이 세고 향이 덜할 것이라고 짐작한다. 하지만 화개에서 9900m²(3000평) 넘는 차밭을 가꾸며 추차를 생산하는 오시영 씨는 “따는 시기를 잘 맞추면 추차는 봄 차와 비슷한 향과 맛이 있다”고 소개했다.

봄 녹차향이 유독 강하고 맛있는 건 나무가 추운 겨울을 나면서 축적한 영양성분을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잎으로 보내기 때문이다. 추운 겨울에 받은 스트레스가 맛에는 긍정적 요소가 되는 셈이다. 가을철 일교차가 커지면 녹차나무는 겨울 준비를 위해 잎에 영양성분을 모으게 된다. 추차나 춘차나 같은 원리로 맛을 낸다.

오 씨는 “새잎이 많이 돋으면 추차를 팔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이웃 주민들과 나눠 먹는다”고 말했다.


촬영: 박영대 기자

○야생녹차 대 재배녹차

국내의 녹차 재배지는 크게 세 곳이다. 흔히 알려진 전남 보성군, 제주 그리고 하동이다.

보성과 제주는 인공적으로 밭을 만들어 녹차 씨앗을 뿌리거나 가지를 꺾어 심은 재배 녹차지다. 반면 하동은 산비탈에서 저절로 나고 자란 녹차가 바람에 씨앗을 떨어뜨려 번식해 가는 야생녹차지다.

야생녹차와 재배녹차는 제각각 장단점이 있다.

맛이나 향으로 치자면 야생녹차가 으뜸이다. 색감으로는 재배녹차를 따를 수 없다. 녹차의 품종이 달라서가 아니라 따는 방법, 만드는 방법이 달라서다.

야생녹차는 소량 생산을 의미한다. 전국 녹차 재배 면적의 16%에 불과한 하동군의 녹차 재배 농가는 무려 1700여 가구다. 일일이 손으로 잎을 따서 녹차의 엽록소를 최대한 보존한 뒤 무쇠 솥에 두 번 ‘덖어서’ 내놓는다. 물기를 말리는 과정인 덖음 기술이 녹차의 미묘한 맛을 좌우한다. 그래서인지 하동에는 덖음 기술로 농림부의 인증을 받은 ‘녹차 명인’이 3명이나 있다. 전국의 녹차 명인은 모두 4명이다. 나머지 한 명은 전남 순천시에 있다.

재배녹차는 대량화, 기계화를 의미한다. 녹차나무 사이로 기계가 다니며 잎을 대량으로 거둬들이고 증기를 뿜는 기계로 쪄낸 뒤 기계로 덖는다. 이 과정에서 녹차 잎이 제 모양을 보존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재배녹차는 골고루 찌기 때문에 색감이 연초록으로 뛰어나고 맛이 균일한 특성이 있다.

전남 농업기술원 차 연구시험장 신기호 실장은 “덖음 기술이 좋지 않으면 자칫 탄 맛이 날 수 있는데 기계로 찌고 덖을 경우 맛이 들쭉날쭉하지 않아 품질이 보장된다”고 말했다.

관광지로선 재배녹차지가 널리 알려져 있다. 기계를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가지치기를 하는데, 나무 높이가 일정하게 유지돼 통일된 시원함이 있다. 재배녹차는 인공적으로 조성한 밭이라 넓기도 하고, 잘 다듬어진 초록색 밭을 보는 것만으로 스트레스가 풀린다.

반면 야생녹차는 차나무의 키가 들쭉날쭉하고, 이 산 저 산에 조금씩 흩어져 있다. 감나무 밤나무 등이 녹차밭 사이에 삐죽 튀어나와 있어 재배녹차 밭처럼 단아한 느낌은 없다. 하지만 이곳에는 대자연과의 조화가 있다. 자라는 대로, 생긴 대로 볼 수 있는 천연의 맛이다.

하동군청에서는 관광지의 명성을 높이기 위해 야생녹차 밭의 유실수를 옮겨 심을 경우 농민들에게 보상금을 주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돈도 마다하고 밭 한가운데 자라는 감나무나 밤나무를 옮기지 않는다. 감이나 밤이 먹고 싶어서가 아니다.

우전차 명인 김동곤 씨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4∼5월 농민들이 밭에서 하루 종일 녹차 잎을 따려면 쉬거나 새참을 먹을 때 햇볕을 가릴 곳이 필요하지요. 감나무에 감이 익어도 따지 않는 건 새에게 먹을거리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녹차 밭 인근에 차를 세워 두고 아이들과 함께 밤나무에서 밤송이를 따보거나 홍시가 익어가는 모습만 봐도 가을이 가슴 속으로 들어온다.

○녹차에 대한 오해와 진실

얼마 전 농약 녹차 파동이 있은 뒤 녹차 소비량이 뚝 떨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녹차나무는 병충해에 강해 여름 장마철을 제외하고는 농약이 필요 없다고 한다.

아모레퍼시픽 설록차연구팀 김영경 연구원은 “염소에게 녹차 잎을 먹이려고 해도 먹지 않는다”며 “잎의 향기가 강하고 벌레가 거의 끼지 않는 게 녹차나무의 특성”이라고 말했다.

다만 여름 장마철에는 진딧물이 잘 들러붙어 농약을 치게 된다. 농약은 치고 나서 열흘 정도 지나면 거의 사라지기 때문에 이때 수확하면 큰 문제가 없다는 설명이다. 일부 농가에서 조급한 마음에 미리 수확해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최근 하동, 보성군 등은 정부로부터 청정지역 또는 무공해 인증을 받아 정기 검사를 받는다고 한다.

녹차는 항암, 항균, 충치 예방, 다이어트 등에 효과가 있다고들 한다. 차 속의 항산화성분인 카테킨과 카페인이 주로 이런 역할을 한다.

하동녹차연구소 김종철 선임연구원은 “녹차의 카페인은 피로를 풀어 주고 피를 맑게 해 준다”며 “커피의 카페인과 달리 차 속 ‘데아닌’이라는 아미노산 성분이 카페인을 중화시켜 지나치게 중추신경을 자극하는 부작용은 없다”고 말했다.

비에스클리닉 박용우 원장은 “동물 실험 결과 카테킨과 카페인을 함께 섭취하면 살이 빠지고 심장에 건강한 자극을 준다는 연구 결과가 나온 적이 있다”며 “하지만 인간이 이 정도 효과를 보려면 녹차를 너무 많이 마셔야 하기에 실용성에는 의문이 있다”고 말했다.

녹차의 데아닌이 풍부하면 단맛이 강해지고 탄닌과 카테킨이 많으면 떫은맛이 강해진다. 겨울이 끝날 무렵 막 솟아오른 새잎에는 데아닌이 풍부한 반면 햇볕을 쬘수록 탄닌이 많아진다. 우전보다는 세작, 세작보다는 중작, 중작보다는 대작이 떫은맛이 더 나는 이유다.

하지만 햇볕을 넉넉히 받고 자란 모든 과일이나 식물이 그렇듯 녹차도 잎이 커질수록 바이오 플라보노이드(비타민 P)라는 항산화효소가 잔뜩 들어 있다. 특히 가을 녹차에는 이 성분이 풍부하다.

녹차를 맛있게 먹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녹차는 우려내는 방법에 따라 떫은맛이 강해지기도 하고 약해지기도 한다. 적당히 달고 적당히 떫은맛을 즐기려면 끓였다가 1분 정도 식힌 물에 녹차를 50 대 1 비율로 넣고 1, 2분간 우려내면 좋다. 달면 단대로, 떫으면 떫은 대로 녹차는 매번 새로운 맛이다.

글·하동=하임숙 기자 artemes@donga.com

사진·하동=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디자인=김성훈 기자 ksh97@donga.com

▼ 녹차의 고장 “볼거리 먹을거리도 많아요”▼


촬영: 박영대 기자

하동, 보성, 제주 지역은 녹차 여행을 하기에도 좋지만 워낙 잘 꾸며진 관광지라 주변을 둘러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 하동

일년 내내 축제가 벌어지는 하동은 얼마 전 악양면 대봉감 축제가 끝나고 9∼11일 참숭어 축제가 열린다.

하동의 겨울 명물인 참숭어를 알리기 위해 금남면 수협 본점 인근에 직판장 등을 열어 놓고 관광객이 참숭어 회, 구이를 무료로 시식하게 하고 해상관광 유람선도 무료로 승선하게 한다.

초등학생 농악경진대회, 벨리댄스 공연, 각설이 공연 등 다양한 축제도 벌어진다. 숭어는 사실 싸고 흔한 생선이다. 하지만 물살이 센 한려해상국립공원의 청정해역에서 자란 참숭어는 육질이 단단하고 뻘 냄새가 나지 않아 하동 주민들이 “가을 전어에 견줄 만하다”고 자랑하는 특산물이다. 055-880-2451

대봉감 축제는 끝났어도 악양을 찾아 보면 좋다.

조금 과장해서 어린 아이 머리통만 한 대봉감을 생산지 가격으로 살 수 있다. 악양에서 재배된 대봉감은 임금님께 바치는 진상품이기도 했다. 도시지역에서 개당 1000∼1500원 하는 대봉감을 45개들이 한 상자에 4만 원이면 살 수 있다. 055-880-2731

대봉감을 사러 가는 길에 악양면 평사리에 있는 ‘최참판 댁’을 들러도 좋다. 박경리의 소설 ‘토지’가 인기를 끌면서 관광객들이 “최참판 댁이 어디 있느냐”고 하도 물어 7년 전 한옥 14동으로 일부러 만들었다. 2004∼2005년 방영된 드라마 ‘토지’는 이곳에서 촬영됐다. 하동군이 뽑은 ‘명예 참판’과 ‘관광 해설사’들이 전통가옥의 구조에 대해 설명해 준다. 산을 좋아하면 쌍계사, 칠불암을 찾아도 좋다.

이곳에서는 섬진강에서 난 재첩으로 만든 재첩국, 강가에서 잡히는 참게로 걸쭉하게 끓인 참게탕, 참숭어 회, 토종 흑돼지로 요리한 떡갈비 등을 먹으면 좋다. 잠잘 곳은 선택의 폭이 넓지 않다. 여관, 모텔 등이 전부다.

# 보성

보성에서 가장 큰 녹차 밭인 대한다원으로 가는 길에는 삼나무가 길고 곧게 우거져 있다. 이 길을 걷다 보면 마치 비밀의 정원으로 들어 가는 묘한 느낌을 받는다.

이곳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율포 해수욕장으로 가면 해수녹차탕을 즐길 수 있는 시설이 몇 군데 있다.

바닷물을 끌어다 녹차로 우려낸 탕 속에 들어가면 건강이 무척 좋아지는 느낌이 든다. 소금물과 녹차가 제각각 살균효과를 내며 녹차는 미백효과까지 준다고. 집에서도 녹차찌꺼기를 모아 그릇에 담아 물을 넣어 팔팔 끓인 뒤 식혀서 세수할 때 사용하면 미백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군에서 운영하는 해수탕 이용료는 성인이 3500원, 민간에서 운영하는 곳은 5000원이다. 061-853-4566

보성에서 유명한 먹을거리는 꼬막정식과 녹차 먹인 돼지고기, 전어회다. 콘도도 있어 단체 관광객이 머무르기도 적당하다.

# 제주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에 있는 아모레퍼시픽의 녹차 밭과 설록차 박물관을 둘러본 뒤에는 인근의 소인국 테마파크와 분재예술원을 가보면 좋다.

소인국 테마파크는 미니어처 테마파크로 중국 쯔진청,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언덕 꼭대기의 샤크레퀘르 사원, 이탈리아 피사의 사탑 등 30개국 유명 건축물 100여 점의 미니어처가 전시돼 있다. 성인 6000원, 064-794-5400.

분재예술원은 1992년 북제주군 한경면에 문을 연 곳으로 제주에서 자생하는 황피 느릅나무, 괴불나무, 모과나무, 단풍나무 등 분재 1500여 점이 옹기종기 전시돼 있다.

중국의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이 제주도 방문길에 들르는 등 명사들이 즐겨 찾는 곳으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을 표방하고 있다. 성인 7000원, 064-772-3701

하임숙 기자 arteme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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