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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6년 10월 17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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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이 프랑스 경찰을 테러 목표로 삼는 사례가 부쩍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그해 8∼10월에만 파리와 인근 지역에서 경찰 11명이 숨지고 17명이 부상했다.
FLN이 경찰서를 폭탄 테러할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퍼져 나가는 만큼 알제리 이민자들에 대한 경찰의 분노와 복수심도 커져 갔다. 프랑스 식민지인 알제리에서 1954년 독립전쟁이 시작된 이래 프랑스의 알제리 이민자들을 향한 차별과 혐오는 더해만 갔다.
10월 2일, 테러로 숨진 한 경찰의 장례식이 열렸다. 모리스 파퐁 당시 경찰청장은 장례식에 참석한 경찰들에게 선언했다. “10배로 갚아 줘야 한다. 적들을 부숴라. 내가 책임지겠다.”
10월 5일, 파리 경찰은 “알제리인을 대상으로 파리 및 인근 지역에서 오후 8시 반∼다음 날 오전 5시 반 통금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FLN의 주도로 17일 통금령을 저지하기 위한 대규모 거리 시위가 벌어졌다. 알제리 이민자 3만여 명이 파리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7000명이 넘는 경찰이 지하철역과 기차역 등지에서 일제 검거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평화로운 시위였지만 총기로 무장한 파리 경찰과 특공대는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경찰의 총탄과 주먹이 그들의 목숨을 앗아 갔다. 일부는 폭행으로 의식을 잃은 뒤 센 강에 던져져 익사했다. 경찰서로 붙잡혀 간 일부 시위대는 마당에서 살해됐다.
이후 프랑스 경찰은 무력충돌이 우연히 일어났으며 진압 과정에서 단 3명의 알제리인이 숨졌다고 발표했다. 아직도 사망자 수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 사건은 프랑스 정부의 철저한 검열과 언론의 은폐로 오랫동안 묻혀 있었다.
‘파리 대학살’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은 1998년 프랑스 정부와 파리 시가 학살극이 있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부터. 이때 프랑스 정부는 사망자가 40명이라고 밝혔다.
2001년 10월 17일 학살극의 중심이었던 생미셸 다리 근처에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패가 세워졌다. “1961년 10월 17일 평화 시위 도중 유혈 진압으로 사망한 다수의 알제리인을 기리며….”
모리스 파퐁만 훗날 이 사건이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협력한 죄로 10년형을 선고받았을 뿐 지금까지 알제리인 학살에 관련된 혐의로 기소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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