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61년 ‘논개’ 시인 변영로 타계

  • 입력 2006년 3월 14일 03시 0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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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분노는/종교보다도 깊고/불붙는 정열은/사랑보다도 강하다/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그 마음 흘러라.’(‘논개’ 중)

‘논개’의 시인 수주 변영로(樹州 卞榮魯)가 1961년 3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64세였다.

수주(樹州·나무고을)는 경기 부천의 옛 이름이다. 부천시 고강본동에는 변(卞)씨 문중 소유의 산이 있으며 이곳에 변영로와 형제들, 부모와 조부모의 묘가 있다. 변영로는 조상이 500여 년 살아 온 고향의 이름을 아호로 삼았다.

변영로는 서울 재동과 계동의 보통학교를 거쳐 중앙학교에 들어갔지만 체조 교사에게 대든 일로 학교를 그만뒀다. 그렇지만 어학에 재능이 남달라서 1915년 조선중앙기독청년회학교 영어반 3년 과정을 6개월 만에 마치고 부설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1918년에는 자신이 졸업하지 못한 모교의 영어교사로 일했다. 이 무렵 영시 ‘코스모스’를 발표했다. ‘폐허’ 동인으로 문단에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한참 전이었지만(그는 1920년대 이후 활발하게 시를 썼다) 변영로는 이때부터 ‘천재시인’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문’을 영문으로 번역해 해외로 발송하기도 했다.

‘논개’는 1924년 발간된 시집 ‘조선의 마음’에 수록됐다. 강렬한 ‘논개’뿐만 아니라 시집에 실린 작품 대부분이 민족적 색채가 짙다. 이 시집은 출간 직후 일제에 의해 판매 금지 및 압수령이 내려졌다. 변영로의 시는 올곧고 저항적인 시편들로 알려졌지만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잘 나타낸 작품이기도 하다. ‘생시에 못 뵈올 임을’ 등이 그렇다. ‘생시에 못 뵈올 임을/꿈에나 뵐까 하여/꿈 가는 푸른 고개 넘기는 넘었으나/꿈조차 흔들리우고 흔들리어/그립던 그대 가까울 듯 멀어라.’

동아일보가 발간하던 여성지 ‘신가정’의 편집장으로 근무하던 변영로는 1936년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소사건에 연루됐다. ‘신가정’ 표지에 손 선수의 다리만 게재하고 ‘조선의 건각’이라고 제목을 붙여 총독부의 비위를 건드린 것이다. 총독부의 압력으로 회사를 떠났지만 마음을 굽히지 않았다. 일제의 압박이 극에 달했던 1940년대에는 향리에 칩거했다.

그의 형제 모두 두드러졌다. 큰형 영만은 국학자로 약관에 법관에 오를 만큼 뛰어났다. 영문학자인 둘째형 영태는 국무총리를 지냈다. 변영로도 광복 후 성균관대 영문과 교수, 대한공론사 이사장 등을 지냈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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