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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5년 12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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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하여’(홍삼득)는 재미있게 읽히는 장점을 지녔지만 도구성/비도구성 논리로 대상작품을 끝까지 몰아가는 단순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현실과 신화의 경계지점으로서 ‘몽고반점’”(표정옥)은 지나치다고 할 정도로 치밀하게 분석함으로써 신뢰감을 주었으나 여러 이론을 풍문을 끌고 오듯 해서 신뢰감을 떨어뜨렸다. ‘역사에 대한 세 개의 주석’(양윤의)은 김훈의 ‘칼의 노래’, 성석제의 ‘인간의 힘’, 김연수의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을 서사담론이라든가 역사의식의 측면에서 비교한 것이다.
소설에 대한 관점을 제대로 갖춘 것이 돋보이긴 하나 서술과정에서 전지적 제스처를 취한 것이 결정적인 흠으로 남고 말았다. 이 글은 최근 평단에서 유행하는 서술방법과 용어들에 지나치게 민감했던 사례가 된다.
‘삼계화택에서 해탈에 이르기 위한 구도’(박수현)는 박민규의 장편과 단편들을 삼계화택, 유아독존, 색즉시공, 낙천과 같은 불교이론을 끌어들여 재해석의 경지를 보여 준 만큼 비평주체로서의 제 목소리를 성공적으로 낸 것이 된다.
이런 상식화된 설법은 활용도가 높은 반면 비평에 적용할 경우 엉성하다든가 부자연스럽다든가 하는 반응을 사기 쉽다. 어떤 이론이든지 공부는 최대한으로 하고 활용은 최소한으로 하는 ‘비경제적인’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 울림이 큰 비평을 쓸 수 있다. 앞으로, 박수현 씨에게 울림이 큰 비평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조남현 서울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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