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 실패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을까

  • 입력 2005년 9월 15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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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년 전 오늘 단행됐던 인천상륙작전은 6·25전쟁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꾼 역사적 사건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의 의미=이 작전은 북한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한 지 80일 만인 1950년 9월 15일에 단행됐다. 작전명은 ‘크로마이트(Chromite)’. 항공모함과 구축함 등 261척과 16개국 7만5000여 병력이 투입됐다. 이 작전은 전쟁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꿨다. 인천에 상륙한 연합군은 경인가도를 따라 서울로 진격해 북한군을 격멸하고 9월 27일 중앙청 옥상에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다.

허남성(許南성) 국방대 교수는 “인천상륙작전이 아니었다면 당시 유엔군은 낙동강전선에서 반격작전을 시도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더 많은 인명 손실은 물론 한반도 전체가 황폐화되고 초토화됐을 것”이라며 “6·25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그나마 국토가 덜 파괴될 수 있었던 것은 인천상륙작전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인천상륙작전은 대한민국 건국사에도 중요한 사건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많은 신생국이 내전이나 이념 분규로 사라지거나 혼란에 빠진 것처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라는 게 많은 학자들의 견해다.

그리고 이 작전은 16개 회원국이 참여한 유엔군에 의해 수행돼 집단안전보장체제가 처음 성공한 사례라는 의미를 함께 갖는다. 유엔군의 성공적인 구성과 활동을 통해 약소국이 무력에 의해 함부로 병합되거나 정치체제를 강요받아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 국제정치 무대에 정립되었으며 이 원칙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확인된 것이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의 주역이 맥아더라는 데에도 별다른 이견이 없다. 6·25전쟁을 연구한 김영호(金暎浩·정치학) 성신여대 교수의 설명,

“당시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가능성을 5000분의 1로 봤다. 조수간만의 차가 커 성공 가능성이 낮다고 본 것이다. 때문에 미 합참은 맥아더에게 부산과 가까운, 인천보다 더 남쪽에 상륙하라고 권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김일성(金日成)과 소련도 인정한 부분이다. 옛 소련의 비밀해제된 문서를 보면 스탈린이 인천상륙작전을 예측하지 못한 것을 맹비판하며 북한 군사고문단장을 교체했다.”

▽동상 건립 경위=맥아더 동상은 1957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7주년을 맞아 시민들이 모금한 1억2000만 환을 들여 인천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만국공원(현 자유공원)에 건립됐다. 조각가 김경승(金景承·작고) 씨가 만든 5m 높이의 이 동상은 맥아더 장군이 오른손에 쌍안경을 들고 월미도를 내려다보고 서 있는 모습이다. 장경근(張暻根·1911∼1978) 당시 내무부 장관과 동상건립추진위원회의 주도로 이뤄졌다.

황금천 기자 kchwang@donga.com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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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논란의 진위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동상 철거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맥아더가 양민학살자이자 전쟁광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맥아더가 노근리 양민학살과 신천 양민학살을 명령한 책임자이며 한반도에 핵폭격을 가하는 작전을 수립해 한민족 대다수의 생존을 위협했다’는 확인되지 않은 설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노근리 양민학살은 1950년 7월 미군이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철교 밑에서 한국인 양민 300여 명을 사살한 사건. 이 사건을 특종 보도한 AP통신은 당시 군 작전명령 중에서 ‘그들(피란민들)을 적군으로 대하라’는 명령의 원문(原文) 등 미군의 공식문건 2건을 공개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지령이 맥아더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는 증거가 제시된 적은 없다.

신천 양민학살은 1950년 말∼1951년 황해도 신천군에서 3만5000명의 양민이 학살된 사건으로, 북한 측은 이 양민학살이 미군에 의해 자행됐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장을 직접 조사하고 목격자의 증언을 들어 소설 ‘손님’을 쓴 황석영(黃晳暎) 씨는 이 학살이 좌우 대립 과정에서 동족 간에 발생한 비극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설령 북한 측의 주장대로 미군이 자행한 학살이라 해도 최고사령관이 주둔지 작전까지 직접 지시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다.

또 맥아더가 서울 수복 직전 “그곳에는 아가씨도 부인도 있다. 3일 동안 서울은 제군의 것”이라는 말을 했다는 주장에 대해 박명림(朴明林·연세대·정치학) 박태균(朴泰均·서울대·역사학) 정병준(鄭秉峻·목포대·역사학) 교수 등 6·25전쟁 자료를 많이 살펴본 학자들은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김영호 성신여대 교수는 “6·25전쟁 때 일부 미군이 설사 양민 학살이나 약탈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이를 최고사령관의 명령으로 하달한다는 것은 미국의 헌법정신에 배치된다는 점에서 상상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한반도 핵폭격 주장은 중공군이 개입한 뒤 맥아더와 미 합참이 북한 주둔 중공군과 만주 일대에 대한 핵폭격을 가상작전(conceptual plan)으로 검토한 것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이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 것이었고 맥아더는 이후 만주 핵폭격을 주장했다는 것이 김영호 교수의 설명이다.

김일영(金一榮·정치학) 성균관대 교수는 “맥아더의 주장대로 만주에 대한 핵폭격이 이뤄졌다면 모르지만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로 인해 유엔군사령군 직에서 해임됐는데도 50여 년이 지난 뒤 그 책임을 따지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맥아더가 만주 폭격을 고집하면서 당시 트루먼 대통령과 갈등을 빚자 미국 내 반대파가 ‘문민우위’의 원칙을 무시한 ‘전쟁광’이라고 비판했는데 이를 북진통일을 주장하던 한국 상황에 적용하는 것은 역사적 맥락을 무시한 주장”이라고 말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맥아더 동상 철거주장 단체는▼

인천 중구 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에 대해 처음 문제를 제기한 단체는 시민단체인 ‘평화와 참여로 가는 인천연대’(인천연대·상임대표 신현수)다. 인천연대는 1996년 6월 출범해 인천 지역에 7개 지부를 둔 단체로 회원은 3400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단체는 2002년 미군 장갑차 여중생 치사 사건으로 반미감정이 증폭되자 같은 해 11월 맥아더 동상의 이전을 요구하고 나섰다. 인천시가 냉담한 반응을 보이자 인천연대는 2003년 6∼12월 맥아더 동상 주변에서 이전을 요구하는 소규모 집회를 잇달아 열었다. 하지만 인천연대는 맥아더 동상의 철거가 아닌 이전을 요구해 왔고 맥아더 동상은 세상의 별다른 이목을 끌지 못했다.

그러다 올봄 좌파적 성향의 단체인 ‘우리민족연방제통일추진회의(연방통추·공동대표 김수남)’가 동상 철거를 요구하고 나서면서 이 문제의 주도권을 쥐었다. 연방통추와 인천연대는 서로 관련이 없다. 연방통추는 법원이 이적단체로 규정한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에서 오래 활동한 60대 이상 40여 명이 주축이다.

이들은 올해 5∼7월 자유공원과 경인전철 인천역 광장 등에서 33회에 걸쳐 집회를 열고 “맥아더는 민족 분단의 원흉이며 제국주의의 상징”이라며 동상 철거와 미군 철수를 주장했다.

그리고 11일 맥아더 동상 앞에서 열린 ‘미국 강점 60년 청산 및 주한미군 철수 국민대회’를 계기로 전국 규모 조직인 전국민중연대(상임대표 정광훈)가 가세했다. 폭력 사태를 빚은 이날 집회를 주최한 민중연대엔 범민련 남측본부와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민주노총, 민주노동당, 반미여성회 등 전국 34개 단체가 가입해 있다. 이들은 신자유주의 철폐, 민중생존권 쟁취 등을 목표로 하고 있다.

민중연대는 이날 집회에서 “맥아더 동상 철거는 만악의 근원인 주한미군을 몰아내겠다는 의지의 선언”이라며 “미군이 60년 동안 우리 민족을 식민통치한 것을 이제는 끝내야 한다. 올해를 주한미군 철수의 원년으로 삼자”고 주장했다.

경찰 관계자는 “맥아더 동상 자체가 목표라기보다는 반미 분위기를 띄워 미군 철수를 사회 이슈화하는 데 궁극적인 목표를 두고 있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황금천 기자 kchw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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