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터지는 여자들 2005 한국의 중년]<1>야속한 ‘반쪽’

  • 입력 2005년 9월 12일 03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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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란에는 채울 게 없다. 여자도 남자도 아닌 ‘제3의 성(性)’을 갖고 있다고 한다. 남편에 따라 혹은 남편과 상관없이 ‘아줌마’ 혹은 ‘사모님’이라 불린다. 가족에게는 누구보다 헌신적이면서도 사회적으로는 이기적인 존재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씩씩하다는 것은 불가사의다. 한국 중년 여성들의 삶과 생각을 담아 보았다.》

10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신촌의 한 음식점. 한 여성 포털 사이트의 같은 커뮤니티에 속해 있는 50대 주부 4명이 오랜만에 만났다.

한미영(가명·55) 씨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남편이 대화라곤 할 수 없지만 자잘한 관심이 늘었어.” 신영숙(가명·54) 씨가 코웃음을 치며 말을 받았다. “그게 바로 잔소리야!”

평소 남편에게 가지고 있던 불만이 기다렸다는 듯 터져 나왔다.

“가끔 남편이 냉장고 문을 열고 ‘안 먹는 게 왜 이리 많아? 쯧쯧! 다 버리겠네’ 하거나 세탁 바구니를 뒤적이면서 ‘빨래할 때가 됐는데 뭐 하는 거야?’라고 해. 그러면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질 수밖에 없어.”

“우리 집은 딸만 셋이잖아. 딸이 제 아빠한테 ‘엄마 힘드니까 청소 좀 도와주세요’라고 하면, ‘집에 여자가 넷인데 내가 청소해야 되겠냐?’ 이런다니까.”

“벽에 못이라도 하나 박으려 해 봐. 온 식구 다 불러. 누구야 의자 준비해라, 누구야 못 줘라, 누구야 망치 줘라…. 그러고 나선 못 하나 박고 뒤처리도 안 하고 가 버려. 차라리 내가 박고 말지!”

“지금껏 가족을 위해 희생했으니까 이젠 집에서 편안하게 쉬어도 된다고 생각하나 봐. 누군 놀기만 했나?”

이들의 대화는 결국 한숨으로 끝났다. 이미정(가명·58) 씨는 “이렇게 왜 사나 하는 생각도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방법도 없다”고 말했다. 신영주(가명·55) 씨도 “몇십 년 같이 살았지만 우린 아직도 모르는 부분이 더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최근 통계청이 결혼생활에 대한 만족도를 조사한 결과 아내가 55.5%로 남편의 65.9%보다 10.4%포인트 낮게 나타났다.

고려대 신경정신과 이민수(李敏秀) 교수팀의 연구 결과 ‘결혼생활에 대한 불만’이 주부 우울증의 가장 큰 원인(29.7%)으로 지적됐다.

남편들은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살림이나 하면서 무슨 투정이야?”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주부들은 그런 남편들 때문에 매일 속 끓이면서 살아간다.

새벽 귀가에 ‘곤드레만드레’는 일상사고, 얘기 좀 하자고 하면 바쁘다고 나가 버린다. 무거운 짐을 옮기고 있는데 TV 앞에 떡하니 자리 잡고 앉아서 꿈쩍도 안 한다. 그것은 참을 만하다. 하지만 친정아버지 생신날 식구들이 모이기로 했는데 전날 회식 때문에 피곤하다고 드러눕는 남편…. 애물단지가 따로 없다.

며칠 전 차로 주차장 벽을 박은 이채영(가명·49) 씨. ‘쿵’ 하고 부딪칠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러나 뒤따라 나온 남편은 자신을 힐끗 쳐다보더니 차 범퍼가 긁혔다고 타박하는 게 아닌가. 이 씨는 분하다 못해 눈물이 핑 돌았다. ‘저 남자, 정말 남편 맞아?’

남편 친구들과의 부부동반 모임에서 노래방을 찾은 박소영(가명·45) 씨는 남편과 싸울 뻔했다.

음치에 리듬감도 없어 노래를 잘 못 부르지만 분위기를 맞추려고 한 곡 불렀다. 그때 남편이 ‘친구 부인’들에게 “정말 노래 못하지, 노래 너무 못해”하면서 자신을 흉보더라는 것. 박 씨는 “창피해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며 “남편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남편이 개인사업을 하는 주부 김현정(가명·48) 씨는 낮에 헬스클럽을 다니거나 쇼핑하면서 친구들에게 남편 험담을 자주하는 편이다.

성에 적극적인 김 씨는 남편에게 잠자리를 많이 요구하는데 그때마다 남편이 피곤하다며 거부하기 때문. 그래도 김 씨는 “밖에 나가 바람을 피울 인물도 못되고 무엇보다 착하기 때문에 그냥 참을 수밖에 없다”며 씁쓸해했다. 한정순(가명·56) 씨의 남편은 젊었을 때 호랑이 기세가 부럽지 않았다. 심지어 외박을 한 다음 날도 집에 당당하게 들어올 정도였다. 한 씨는 “그래, 어디 나이 들어서도 그러나 보자”며 참고 또 참았다.

몇 년 전 사업을 정리하고 집에 들어앉은 다음부터 상황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또 다른 스트레스가 생겼다. 남편이 밥 때만 되면 한 씨를 찾는 것이다. 한 씨는 모처럼 친구들 모임이 있더라도 식사시간에 맞춰 꼭 집에 들어가야 했다.

“자기 멋대로 살다가 이제 와서 나에게 꼬박꼬박 밥을 차려 내놓으라니요.”

끼니마다 밥 차리는 것은 그렇다 치고 주부를 ‘열 받게’ 하는 것은 따로 있다. 아내의 수고를 전혀 몰라주는 것. 여성 포털 사이트 ‘드림미즈’에서 주부를 상대로 ‘남편이 언제 가장 미운가’를 조사한 결과 ‘자녀 양육이나 교육에 대해 협조하지 않을 때’(12.1%)나 ‘시댁 일엔 열심, 친정 일엔 늑장 부릴 때’(12.4%)보다 ‘마음을 몰라줄 때’(15.0%)가 더 많았다.

김현숙(43) 씨는 동갑내기 남편과 친정에만 가면 울화통이 터진다.

신혼 시절에는 “장인어른∼ 장모님∼” 하면서 아양도 잘 부리던 남편이었는데 20년이 지난 지금은 건넛방 TV 앞에 누워서 꼼짝도 안 한다. 친정어머니는 사위가 모처럼 와서 쉬는데 놔두라고 한다.

“낮 12시까지 실컷 자고 일어난 남편은 밥맛이 없다고 점심도 안 먹는대요. 미리 안 먹는다고 하면 차리지나 않지, 먹지도 않을 반찬 마련하느라 장까지 봐 온 우리 엄마만 불쌍해요.”

그래도 미운 정 고운 정 다 든 남편을 팽개칠 수는 없다. “대(大)자로 뻗어서 드르렁거리며 자고 있는 남편을 보는데 아무 이유도 없이 코끝이 찡해질 때가 있어요. 이 남자도 고생 많이 했지 싶어서…. 미워도 참고 살아야지, 어쩔 수 있겠어요.”

한국여성개발원 박수미(朴秀美) 연구원은 “가족 관계의 중심이 부모와 자녀로부터 부부로 이행하는 추세는 바람직한 일”이라며 “이제 부부도 남편은 경제적 부양자, 아내는 가정주부 등 고정된 역할에만 얽매이지 말고 서로 간에 애정과 친밀도를 높여 가야 한다”고 말했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김상훈 기자 core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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