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나에게는 55cm 사랑이 있다’

  • 입력 2005년 7월 23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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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함께 바다에 갔다. 난생처음 보는 바다는 “기절할 만큼 좋았다”. 키가 120cm밖에 안 되는 나를 위해 앉은뱅이걸음을 하며 우산을 받쳐 주던 그의 ‘55cm 사랑’은 바다보다 더 깊고 넓었다. 사진제공 좋은 생각
그와 함께 바다에 갔다. 난생처음 보는 바다는 “기절할 만큼 좋았다”. 키가 120cm밖에 안 되는 나를 위해 앉은뱅이걸음을 하며 우산을 받쳐 주던 그의 ‘55cm 사랑’은 바다보다 더 깊고 넓었다. 사진제공 좋은 생각
◇나에게는 55cm 사랑이 있다/윤선아 지음/296쪽·9500원·좋은생각

“정말 숨 가쁜 데이트였어!” 우리 둘은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그때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얼른 달려가 우산을 하나 사왔다. 우산을 쓰고 나란히 걸으면서 그는 자꾸 나를 힐끔거렸다. 그는 우산을 낮춰 보기도 하고 비스듬하게 기울여 보기도 했다. 그러더니 무릎을 확 구부려 엉거주춤한 자세로 걸어가는 게 아닌가!

“왜 그래?” “내 키가 너무 커서 선아가 비를 다 맞잖아!”

나는 순간 망연자실했다. 그는 자기가 키가 너무 크다는 둥 밥을 너무 많이 먹고 자랐다는 둥 혼자 구시렁대며 걸어갔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오리처럼 뒤뚱거리며….

그의 키는 175cm, 나의 키는 겨우 120cm. 우리는 55cm나 차이가 난다. 거인과 난쟁이다. 하지만 이제 그와 나는 키가 같다. 그가 준 ‘55cm의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KBS 3라디오에서 ‘윤선아의 노래 선물’을 진행하고 있는 저자는 1급 장애인이다.

사람들은 그를 ‘엄지공주’라 부른다. 태어날 때부터 계란껍데기처럼 뼈가 쉽게 부러지는 ‘골형성부전증’이라는 병을 앓아 키가 120cm밖에 안 된다. 어렸을 때부터 전화벨 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라 넘어지고, 재채기를 하다가도 뼈가 으스러졌다.

이 자전적 에세이에는 ‘성공한 장애인’으로 불리기까지 견뎌야 했던 숱한 고통의 순간들이 꾸밈없이 담겨 있다.

첫 직장이었던 은행의 면접시험 날. 한 심사위원이 목발을 짚고 일을 하려면 힘들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닙니다! 다리가 네 개라서 더 빠릅니다. 한번 보시겠어요?”

연애나 결혼은 꿈도 꾸지 못했던 그에게 사랑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

그 사람의 선한 웃음소리와 따뜻한 사랑이 있었기에 올해 초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하는 히말라야 정복에 나설 수 있었다.

이때 그녀의 사랑도, 마음도 부쩍 커졌다.

“내가 넘어야 할 산은 눈앞에 펼쳐진 히말라야만이 아니었다. 내 안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나를 바라보는 낯선 시선들로부터 당당해지기, 따뜻한 도움의 손길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그것이 내가 올라야 할 또 하나의 산이었다.”

평생 목발을 짚고 다녀야 하는 저자. 하지만 그녀는 지금 한 마리 새로 날고 있다.

“도요새 도요새, 그 몸은 비록 작지만/도요새 도요새, 가장 멀리 꿈꾸는 새….”

이기우 문화전문기자 keywo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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