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음악 기행]독일 츠비카우

  • 입력 2005년 6월 10일 08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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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슈만 하우스 인근에서 본 츠비카우 시내. 성모마리아 교회의 높은 첨탑이 보이며 길에는 동독 시절의 고물승용차 트라비가 다니고 있다. 사진 제공 정태남 씨
로베르트 슈만 하우스 인근에서 본 츠비카우 시내. 성모마리아 교회의 높은 첨탑이 보이며 길에는 동독 시절의 고물승용차 트라비가 다니고 있다. 사진 제공 정태남 씨
《1900년대 초부터 독일의 자동차 공업 중심지였던 츠비카우는 동독 시절 ‘트라비’라 불리던 2기통 자동차 트라반트(Trabant)를 생산하던 곳이었다. 이 자동차는 서방에 비해 적어도 30년은 뒤떨어진 수준이었지만 동독인에게는 꿈의 대상이었다. 인구 10만의 츠비카우는 독일 작센 지방의 주요 공업도시다. 이 때문에 삭막한 곳으로 연상되기 쉬우나, 도심에는 기품 있는 옛 모습이 보존돼 있어 도시의 연륜을 느낄 수 있다.》

도시 한가운데에 있는 성모 마리아 교회(Dom St. Marien)의 높은 첨탑이 고풍스러운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뚫고 나온다. 성모 마리아 교회의 기원은 12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15세기 중반∼16세기 중반 후기 고딕식으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성당은 1518년에 프로테스탄트 교회로 바뀌었고, 1522년 마르틴 루터가 츠비카우를 방문했을 때 이곳에서 설교했다. 이 교회는 츠비카우 음악문화의 요람으로, 바흐의 제자 크렙스나 쿤취가 오르가니스트로 재직했다. 쿤취는 어린 슈만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 詩情 넘치는 아름다운 ‘트로이메라이’

성모 마리아 교회에서 걸어서 5분도 걸리지 않는 광장 하우프트마르크트(Hauptmarkt) 5번지에 있는 로베르트 슈만 하우스(Robert-Schumann-Haus)에 들어섰다. 이 집은 슈만이 태어나 7세 때까지 살던 곳을 헐어 내고 재건축한 것으로, 슈만 100주기인 1956년에 동독정부로부터 국립기념관으로 지정됐다. 이 기념관에는 슈만과 아내 클라라의 피아노, 초상화, 사진, 자필 악보, 300여 통의 편지를 비롯해 슈만 연구에 필요한 자료와 유품이 전시돼 있다.

슈만의 어린 시절 초상화 앞에서 발길을 멈추고 꿈꾸는 듯한 아름다움과 시정(詩情)이 넘쳐 흐르는 ‘트로이메라이’의 선율에 젖어 본다. 독일어로 ‘트로이메라이’는 ‘꿈’을 뜻하는 트라움(Traum)에서 파생된 시적인 표현. 이 소품은 13곡으로 구성된 피아노 모음곡 ‘어린이 정경(Kinderszene)’의 7번째 곡으로 슈만의 작품 중에서 가장 청순하고 서정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슈만은 1810년 6월 8일 태어났다. 쇼팽과 같은 해에, 멘델스존보다 1년 늦게 태어났다. 그는 조그만 출판사를 경영하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지성적인 가정 환경 속에서 음악을 접했는데, 소년시절 이미 피아노곡 합창곡 관현악곡을 작곡했고 뛰어난 피아노 연주 실력을 보였다.

○ 유전적 정신질환에 꺾인 ‘동심의 꿈’

로베르트 슈만 하우스. 슈만의 생가를 개축해 기념관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음악보다 낭만주의 문학에 더 빠져 들었고, 종종 병적으로 애수에 젖어 작센 지방의 들판과 숲을 거닐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태어날 때부터 불구이자 저능아였던 누나 에밀리가 죽고, 아버지도 정신질환으로 갑자기 죽자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 앞에서 번민하기도 했다.

아버지와 달리 현실적이며 아들에게 엄격했던 어머니는 슈만을 라이프치히대에서 법학을 공부하도록 했으나, 슈만은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법학 교수 티보가 있던 하이델베르크로 대학을 옮겼다. 티보 교수는 슈만이 가야 할 길은 법학이 아니라 음악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었다.

슈만은 다시 라이프치히로 돌아가 저명한 피아노 선생이었던 프리드리히 비크의 집에 기숙하면서 피아노 레슨을 받지만 손가락을 혹사해 오른손을 쓸 수 없게 되자 작곡에 전념한다. 그는 비크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의 딸 클라라와 결혼하는 1840년까지 많은 피아노 곡을 쓴다. 이 시기 작품은 슈만의 독창성이 매우 돋보이는데 ‘어린이 정경’(op.15)도 그중의 하나다.

많은 작곡가가 어린이를 위한 음악을 썼지만 ‘어린이 정경’만큼 동심의 세계를 따뜻하게 그려낸 작품도 드물다. 이 작품은 슈만이 클라라와 결혼하기 전 열애하던 시절의 작품이다. 따라서 자기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츠비카우에서 보낸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동심의 세계에 몰입해 작곡한 것이다. 꿈을 좇던 시절이 지난 뒤, 그의 삶 앞에는 정신질환이라는 비극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로베르트 슈만 하우스를 나오기 전까지 ‘트로이메라이’의 청아한 선율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 나왔다. 하지만 문을 열고 나온 순간 그 환상은 따발총 같은 폭발음에 깨져 버렸다. 고물 트라비들이 열을 지어 하우프트마르크트 광장으로 몰려오고 있는 게 아닌가? 동독 시절의 꿈을 잊지 못하는 이들로 이뤄진 트라비 동호인 모임이 열린 모양이다. 슈만의 어린 시절의 꿈을 간직한 집 앞에서….

정태남 재이탈리아 건축가 www.tainam-jung.com

▼슈만, 46세 나이로 정신병동서 숨져▼

슈만의 피아노

어린 시절의 꿈을 음악에 싣던 슈만은 1854년 2월 6일 라인 강에 투신했다가 구조됐다. 이후 본 인근의 엔데니히에 있는 정신병동에 수용됐다가 1856년 7월 29일, 46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그는 뒤셀도르프 시립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재임하던 중 젊은 시절부터 앓아 온 정신질환이 깊어진 데다 암투가 횡행하는 큰 조직(오케스트라)을 이끄는 어려움, 음악적 창조력의 감퇴에 대한 부담을 이기지 못해 투신한 것으로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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