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국내에 유일한 부부 영사기사 임내현-박은미 씨

  • 입력 2005년 5월 27일 04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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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 영사 기사 박은미(왼쪽) 임내현 씨가 서울 ‘CGV용산’ 골드클래스 객석에 나란히 앉았다. 온종일 극장에서 살면서도 객석에 앉을 기회가 드문 이들은 곧 손으로 스크린 비율을 재보는 등 ‘직업병’ 증세를 보였다.
부부 영사 기사 박은미(왼쪽) 임내현 씨가 서울 ‘CGV용산’ 골드클래스 객석에 나란히 앉았다. 온종일 극장에서 살면서도 객석에 앉을 기회가 드문 이들은 곧 손으로 스크린 비율을 재보는 등 ‘직업병’ 증세를 보였다.
《매일 영화를 수십번 보는 부부가 있다?

비디오 가게 주인, 아니면 영화에 사활을 건 부부 ‘영화 폐인’일까.

인천 남동구 구월동 ‘CGV인천’에 근무하는 임내현(33) 박은미(29) 씨. 국내 유일의 부부 영사 기사다. 20일 서울 ‘CGV용산’의 영사실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 영화로 맺은 견우와 직녀

영사기를 살펴보는 두 사람.

왜 부부는 극장으로 갔을까? 뻔한 질문이라는 듯 부부는 가볍게 웃는다.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기본이죠. 기사들이 품고 있는 모델은 영화 ‘시네마 천국’의 영사 기사 ‘알프레도 아저씨’일 겁니다. 어둠 속에서 나만의 고독을 씹기도 하고, 지친 이들에게 행복과 낭만을 찾아주고 싶습니다.”(임 씨)

부인은 2003년, 남편은 CGV에 인수된 ‘터미널 시네마’ 경영 팀에 근무하다 지난해 영사 기사가 됐다. 직장에서까지 한솥밥을 먹는다며 어떤 이들은 부럽다고, 또 다른 이들은 걱정된다고 한다. 하지만 아내는 낮에, 남편은 밤에 극장을 지키다 보니 사실상 영화 때문에 만났다가 헤어져 사는 ‘견우와 직녀’다.

근무 교대 시간인 오후 5시경 짧은 만남의 다리가 생긴다. 남편은 아들 수빈(4) 군 등 집안 동정을 ‘보고’하고, 영사 기사 선배격인 아내는 격려의 말을 남긴다.

한국산업인력공단이 1년에 두 차례 필기와 실기 등 자격증 시험을 주관하는 영사기사(영사 기능사)는 최근 젊은 층이 선호하는 직업이다. 여성의 경우 1990년대 후반 첫 기사가 나온 뒤 꾸준하게 늘고 있다. 국내 최대 멀티플렉스인 CGV의 경우 5월에 뽑은 신입 영사기사 18명 중 3분의 1이 여성이다.

○ 불꺼진 극장 외로운 ‘어둠의 지휘자’

하지만 부부가 상상했던 ‘시네마 천국’은 절반만 진실이었다. 영화를 마음껏 볼 수 있지만, 우아한 자태를 뽐내는 백조의 다리가 ‘혹사’ 당하는 것처럼 영사 기사의 하루도 만만치 않다.

영사 기사는 불꺼진 극장 속에서 활동하는 ‘어둠의 지휘자’다. 현상소에서 극장으로 보내 온 프린트는 대개 20분짜리 5, 6권 분량. 영사 기사는 우선 분리된 필름을 하나로 만든 뒤 CF, 예고편, 비상 시 대피 요령과 주의사항, 돌비 음향 안내 등을 붙인다. 편집이 끝난 필름은 자동으로 필름을 풀거나 감아 주는 플래터로 옮겨진 뒤 영사기를 통해 빛으로 쏘아진다.

“영사기에 필름을 거는 것은 눈썰미가 있으면 하루 만에도 배울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필름과 기계의 상태에 대한 점검과 비상 사태 때 응급 조치 실력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세요. 10여 개의 영사기가 동시에 돌아가는데 사고라도 생기면….”(박 씨)

하나의 필름으로 여러 스크린에서 약간의 시차를 두고 상영하는 ‘인터록’도 있다. ‘반지의 제왕’처럼 한 영화를 전관에서 상영할 때는 필름의 ‘동선’이 100m에 이르기도 한다. 음향상태는 물론 극장에서 영화가 끝난 뒤 불이 켜지는 속도를 결정하는 것도 영사 기사의 몫이다.

○ 극장에서 일어난 일

영사 기사들은 작은 영사창을 통해 관객을 바라본다. 영사창은 객석의 웃음과 눈물을 엿볼 수 있는 통로. 재미있는 것은 영화가 시작되면 관객들은 뒤에 있는 영사창을 새까맣게 잊는다는 점이다.

“실컷 웃고 나서 영화가 뭐 이러냐는 관객들은 좀 얄밉습니다. 내가 뒤에서 다 봤는데…. 그럴 때는 내가 그 영화의 감독이나 주연 배우인 것처럼 섭섭해요.”(박 씨)

“극장이 거의 텅 빈 상태였는데, 어느 순간 상체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관객이 있어 놀랐습니다. 연인처럼 보였는데 영화는 안 보고 다른 영화를 찍고 있었습니다(웃음).”(임 씨)

○ 영사실에서 생긴 일

영사 기사들은 여름을 싫어한다. 필름이 열이나 습도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습기 때문에 필름이 쩍쩍 들어붙는 소리가 들리면 가슴이 쿵쿵 울립니다. ‘우리 형’의 경우 마지막 1분이 끊겨 환불 사태를 경험한 적도 있습니다.원빈이 나와서 참았죠.”(박 씨)

이에 남편 임씨는 옆에서 ‘하하’ 웃기만 했다.

올해 초 영화 ‘말아톤’의 ‘조승우 마이크’ 사건은 영사 기사들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한 극장에서 조승우가 나오는 장면마다 녹음용 마이크가 노출된 것. 현상 과정에서 마이크가 처리되지 않은 프린트가 그대로 상영된 것이다. 한동안 영사 기사들 사이에서 “그 극장에서는 마이크가 나오지 않냐”는 안부 겸 확인 전화가 오갔다.

○ 그래도 우리는 시네마 천국으로 간다

두 사람은 상상했던 시네마 천국은 아니지만 영화 속으로 들어오기를 잘했다고 한다.

“영사 기사는 자유스럽고 언제나 새로운 꿈을 주는 일입니다.”(박 씨)

“부모님이 꼭 극장에서 계모임을 가지세요. 그럼 아들은 영사창에서 ‘V 자’ 한번 그려야 합니다. 창피하다고 말하면서도 마음은 행복합니다. 아들이 세 살 때 ‘스파이더 맨’을 끝까지 봤는데 나중에 함께 기사로 일할지도 모르죠.”(임 씨)

극장에 불이 켜지고 관객이 모두 빠져나가도 부부는 영사창을 뜨지 않는다. 배우도 감독도 아닌 자막 끝 부분에 등장하는 스태프의 낯선 이름들. 동병상련일까? 그 이름을 기억하는 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두 영사 기사의 몫이다.

글=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사진=강병기 기자 arch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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